‘인질카드’ 쥔 북한, 미사일 발사 이후까지 대비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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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로켓 발사에 대비해 일본 자위대가 31일 북부지역 아키타(秋田)에 요격용 패트리엇 미사일(PAC3)을 배치했다. 자위대는 북한이 발사할 로켓이 일본 북부지역을 통과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이 지역으로 요격용 미사일을 이동시켰다. [아키타 AFP=연합뉴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억류 중인 미국 ‘커런트 TV’ 소속 한국계 유나 리와 중국계 로라 링 기자에 대해 “증거 자료들과 본인 진술을 통해 불법 입국과 적대 행위가 확정됐다”며 “조사를 계속하는 한편 확정된 혐의에 근거해 재판에 기소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중간조사’ 결과까지 발표한 뒤 현재로선 조기 석방 의사가 없음을 미국 측을 상대로 압박한 것이다.

북한은 1996년 압록강을 넘었던 미국인 에번 헌지커를 간첩 혐의로 체포해 두 달간 붙잡아 놓는 등 그동안에도 미국인을 억류한 사례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기소까지 언급한 예는 드물다. 통일부 당국자는 “68년 미군함 푸에블로호 나포 때를 제외하면 공개된 사례 중에선 재판까지 갔던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북한의 노림수가 결국 로켓 발사 이후를 겨냥한 ‘인질용’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이번 억류 사태는 로켓 발사를 앞둔 민감한 시기에 북한이 ‘적대 행위’와 같은 민감한 사안이라고 주장하는 데 심각성이 있다”며 “북한으로선 향후 미국이 강경 압박에 나서지 못하도록 하는 견제 수단 또는 미국의 대화 제의에 대한 응대 제스처로 억류 여기자들을 이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 여기자 억류 사태가 11개월을 끌었던 푸에블로호 사건 때처럼 크게 장기화될지, 아니면 두 달 만에 석방된 에번 헌지커 때처럼 미국의 특사 외교로 마무리될지는 북·미 협상에 좌우될 전망이다.

푸에블로호 때는 북·미 간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며 협상이 쉽게 진행되지 않아 승무원 82명의 구금 상태가 계속됐다. 반면 헌지커 사건 때는 빌 리처드슨 의원이 방북해 석방의 물꼬를 텄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번 억류 사태가 악화될지 아니면 급반전될지는 미국의 고위급 협상 의지와 북한이 어디까지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할지에 달렸다”고 분석했다.

개성공단에서 ‘체제 비방’과 ‘탈북 책동’ 혐의로 억류돼 이틀째 조사받고 있는 현대아산 직원 한 명도 이날 오후까지 남측과의 접견이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북한은 과거 금강산 관광객 민영미씨 억류 사태 때처럼 말실수만을 문제 삼은 게 아니라 이번엔 해당 직원이 ‘여성 종업원에게 탈북을 책동했다’고 주장했다. 대북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대목도 이 부분이다. 가능성은 낮지만 북한이 ‘중차대 범죄’로 간주해 거액의 보상을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 평양으로 이송하는 등의 극단적 행태를 취하며, 대남 압박 카드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북한이 남측 직원 억류를 정부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 움직임에 대한 견제용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북한이 민간인 안전을 대외용으로 쓰려 할 경우 국제사회에서 ‘인질 외교국’이라는 비판이 쇄도할 수도 있다. 북한이 억류 여기자들과 개성공단 남측 직원 조사를 놓고 각각 “조사는 유관 국제법에 부합되게 하고 있다” “기본적 인권은 보장하겠다”고 밝힌 건 이 같은 역효과도 염두에 뒀기 때문으로 보인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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