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의 시시각각

일하든지 아니면 꺼져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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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오르테가 가설은 그야말로 가설일 뿐이다. 그것도 논란 많은 가설이다. 과학의 생산성을 어찌 논문 인용도로만 평가할 수 있겠나. 많은 과학자가 그 주장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터다. 콜 형제가 과학보다 정치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들의 가설이 더욱 확고한 이론적 토대를 갖췄지 않았겠나 싶다. 특히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대한민국 정치라면 말이다.

여의도를 꽁꽁 얼린 박연차 리스트란 것도 이미 신물 나도록 봐온 데자뷔다. 과대망상적 과시욕을 지닌 기업인이 던져준 은전(恩典)을 주린 개들처럼 덥석덥석 물었다. 꼬리 칠 줄은 알았어도 가려 먹을 줄은 몰랐으니 탈이 안 날 수 있겠나. 전직 대통령의 ‘별 볼일 없던’ 형에서부터 전 정권들의 실세들, 야당의 차세대 리더들까지 줄줄이 검찰에 불려가고 쇠고랑을 찼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열리는 정기세일은 이번에도 예외가 없다. 키다리 아저씨의 넓은 오지랖에 의외의 여권 인사들에게까지 고깃점이 날아갔다는 게 새롭다면 새로운 상품이다.

치부가 드러나기 전까지 그들(그리고 그 동료들)이 하던 일이 뭔가. 얼어붙은 봄 이전 여의도는 뜨거운 겨울이었다. 무능 여당과 생떼 야당의 양보 없는 대치는 전기톱과 해머로도 결판나지 않았다. 몇 명은 업혀 나가고 몇 명은 끌려 나가는 동안 민생법안은 서류철 속에서 깨어날 줄 모르고 경제 살리기는 여전히 서강 쪽 불이다. 추경예산안 심의와 주요 법안 처리처럼 할 일이 태산인 4월 임시국회도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검찰 수사에 대한 정치 공방으로 날새고 부도덕한 면책특권 속에 숨기 급급하리란 게 어렵지 않은 예상인 까닭이다. 게다가 제사보다 젯밥, 재·보선도 곧 있지 않느냔 말이다.

여기까지 동의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가설에도 동의가 어렵지 않을 터다. “정치인들의 숫자를 줄인다 하더라도 정치 발전의 속도가 느려지지 않는다.” 사실 국회의원 수를 줄여야 한다는 건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미국 하원이 국민 70만 명당 의원 1명, 일본 중의원은 27만 명당 1명이다. 일본은 그것도 많다고 의원 수를 30% 정도 줄이려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국민 16만 명당 1명씩의 의원나리들을 모시고 있다. 그것이 꼭 필요한 수치라면 통일 후엔 의원 수를 500명으로 늘려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 국민이 뭐가 부족하고 아쉬워 그리 많은 대표자를 필요로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참에 우리도 국회의원 수를 줄이는 것도 방법이겠다. 개헌 없이도 200명 정도로 구조조정할 수 있다. 정치 발전은 거스르지 않고 비용만 줄어드니 남는 장사다. 누가 아나, 획기적 체질개선으로 정치 혁신을 불러일으킬는지. 적어도 할 일 안 하고 오리발만 만지는 후안무치 정객들은 솎아낼 수 있지 않겠나 싶다. 이 어려운 시절 모범이 되는 감동의 정치다. 어느 분야나 그렇듯 구조조정에는 기준이 필요하다. 과학 얘기로 시작했으니 과학 얘기로 마무리해야겠다. 과학계에는 “연구 논문을 내든지 아니면 도태되라(publish or perish)”는 금언이 있다. 이것을 정치로 바꾸면 이런 얘기가 되겠다. 우리 선량과 선량 후보들이 귀담아들었으면 좋겠다. “열심히 일해 성과를 내든지, 아니면 꺼져라(accomplish or perish)!”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