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13. 멜버른 올림픽 출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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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출전했을때 동물원에서 포즈를 취한 필자.

1956년 호주 멜버른 올림픽 대표 선발전이 열렸다. 그러나 나는 대표 선발전에 출전할 수 없었다. 그 전 해인 55년 동계체전에서 고려대 아이스하키 팀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유진오 총장이 1년간 전체 운동부의 대외경기 출전금지령을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올림픽 출전은 운동선수들이 꿈에도 바라는 무대 아닌가. 나는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 고려대 선배로 이미 산업은행에서 은퇴한 김성태.이인성 두 선배가 뜻밖에도 나를 찾아왔다. 나를 위해 고려대 졸업 선수들이 전 고대(全 高大)팀을 만들어 대표 선발전에 출전하겠다는 것이었다. 대표 선발전에 나선 선배들은 성적보다는 나의 플레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노력해 줬다. 덕분에 나만 유일하게 대표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너무 고마운 일이었고, 지금도 그때의 그 후의를 잊지 않고 있다.

올림픽 대표팀엔 실업팀에서 활약하는 쟁쟁한 선배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나와 백남정이 막내였다.

당시 올림픽엔 지역 예선이 없어 아시아에서는 한국을 비롯해 대만.일본.싱가포르.태국 등 5개국이 출전하였다. 첫 경기는 대만과의 경기였다. 한국의 스타팅 멤버는 김영수.안병석.고세태.안영식.최태곤이었다. 당시에는 대만의 실력이 막강해 한국으로선 힘겨운 상대였다.

막내인 나는 주전 선수에 끼이지 못했다. 그런데 김정신 코치(김인건 태릉선수촌장 부친)가 후반전 직전에 나에게 출전할 것을 지시했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찬스만 나면 슛을 던지며 열심히 뛰었다. 후반 20분 동안 20점을 올려 한국팀 최고 득점을 기록했다. 이 경기에서 한국은 대만에 76-83으로 졌지만 다음날 신문엔 나의 활약이 크게 보도됐다. 16개국이 출전한 이 대회서 한국의 순위는 14위였다.

57년이 되어 출전금지 조치가 풀렸으나 고려대 농구부는 주기선.최복영.김완식.이경우(이민형 전 삼성 코치 부친).윤영완.심종린, 그리고 나까지 일곱명에 불과했다. 그 일곱명이 똘똘 뭉쳐 종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해 우수팀 리그전에 출전했을 때 일이다. 실업 최강 산업은행과 첫 경기에서 맞붙었다. 산업은행엔 안병석.고세태.안영식 등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망라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악착 같은 투혼으로 전반을 다섯골이나 앞섰다. 하지만 파울이 문제였다. 후반 5분쯤에 주기선이 5반칙으로 물러났다. 2분 뒤 이경우가 퇴장당해 고려대는 이제 교체할 선수가 하나도 없었다. 시간은 10여 분이나 남아 있었고, 수비 위주의 소극적인 경기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분을 남기고 윤영완이 퇴장당했다. 네명이 뛸 수는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농구를 그만둔 이원민을 스탠드에서 찾아내 유니폼을 입히고 코트에 내보냈다. 최복영이 또 퇴장당하자 이번엔 서울고에서 농구를 했던 고려대 재학생 유호익을 불러냈다. 나는 마지막까지 분투했지만 1점 차 역전패를 당했다. 아쉬운 한판이었다. 요즘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지만 그 당시엔 선수 등록조차 어수룩했던 시절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경기 후 산업은행 선배들은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4학년이 된 58년 겨울 고려대는 대한체육회와의 갈등으로 다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게 됐다. 나는 농구를 계속할 것인지, 공부를 할 것인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결국 공군 참모차장 김창규 장군의 권유를 받고 학업을 일시 중단한 채 이경우.이원민과 함께 공군 농구부에 입대했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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