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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 한류의 비결, 한방 브랜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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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호 22면

①서울 명동 롯데백화점 1층의 가장 목 좋은 자리에 세계 유명 브랜드인 샤넬이 빠지고 국내 화장품 브랜드인 설화수가 들어왔다. 설화수는 국내 한방화장품 시장을 개척, 지난해 5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28일 이 매장에 들른 여성들이 제품을 둘러보고 있다. 최정동 기자

지난달 23일. 서울 명동 롯데백화점 본점 1층에서 작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목이 좋은 자리에 국산 화장품 브랜드인 ‘설화수’가 들어섰다. 원래는 샤넬 차지였다. 롯데백화점과의 갈등 끝에 샤넬이 1월 29일 철수하면서 설화수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국내 기업들의 도전

백화점 1층에는 전통적으로 화장품 브랜드가 입점한다. 일단 화장품은 절대 고객 수가 많다. 브랜드당 자치하는 면적은 6∼7평으로 여성 의류 매장(10평 이상)에 비해 적어 효율적이다. 또 20대부터 60대까지 전 연령층에 이르는 여성 고객 모두를 모을 수 있어 백화점 전체 매출 증가에 도움이 된다. 게다가 화장품의 좋은 향기는 후각적으로도 소비심리를 자극한다.

②경기도 용인의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에는 300여 명의 연구원이 근무하고 있다. 한 연구원이 한방화장품 원료 개발을 위해 각종 약초의 무게를 재고 있다. ③19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토론자들이 국내 화장품 산업의 육성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1층은 백화점의 전체 이미지를 좌우하는 ‘얼굴’이다. 이 때문에 그간 1층 매장은 고급 이미지를 풍기는 외국산 화장품 브랜드 몫이었다. 이미지 경쟁에서 밀린 국산 브랜드들은 백화점에서 줄줄이 밀려났다. 그런데 국산인 설화수가 백화점 얼굴 중에서도 핵이라 할 수 있는 ‘눈’ 자리를 꿰찬 것이다. 국내 화장품 업계 ‘도전’의 현장이다.

“1967년 시작된 40년 한방 연구의 결실이다.”(아모레퍼시픽 임정화 설화수 브랜드 매니저)설화수는 국내 화장품 시장의 1위 브랜드다. 지난해 매출액이 5000억원을 웃돈다. 2위 화장품 업체의 전체 매출액과 맞먹는다. 8만원짜리 ‘설화수 윤조에센스’(60mL)는 지난해에만 160만 개가 팔렸다.

20초에 한 개가 팔린 셈이다. 고급 외국산 화장품이 즐비한 백화점 시장에서도 설화수는 2005년부터 매출 1위 브랜드로 올라섰다.
설화수의 역사는 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모레퍼시픽은 이때 ‘인삼 중심의 한방 미용법’을 개발했다. 72년 인삼 유효성분 추출 특허를 획득하고, 이듬해 인삼을 최초로 화장품에 도입한 ‘진생삼미’를 출시했다. 이후 삼미화장품·삼미진·아모레설화 등의 브랜드를 거쳐 97년에야 설화수가 선보였다.

후발 주자들도 뛰어들었다. LG생활건강은 2003년 궁중한방 브랜드 ‘후’를 출시했다. LG화장품연구소는 수만 건에 달하는 궁중의학 서적을 뒤지고 왕실의 비방이 적혀 있는 수백 권의 고서를 데이터화했다. 출시 당시 150억원이던 매출액은 2007년 1000억원을 돌파했다. 2006년 판매된 ‘후 환유고 크림’은 68만원이라는 국내 최고 가격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2만5000개가 팔려 나갔다.

한방 원료 추출을 위해 천안의 코리아나화장품은 기술연구소에 식물원을 뒀다. 여기서 재배된 대표적 식물이 천연목란. 천연목란에서 주름 개선 기능성 원료를 추출해낸 기술은 지난달 태국 방콕에서 열린 국제발명전시회에서 금상을 받았다. 이 회사는 천연목란 추출 성분을 화장품에 적용해 ‘자인’이라는 브랜드를 출시했다.
한국화장품은 산삼에 주목했다. 다만 드물고 고가인 산삼을 확보하는 것이 무리였다. 연구 끝에 110년 된 천종산삼의 식물 조직 배양에 성공했다. 이렇게 탄생한 브랜드가 ‘산심’이다.

마임은 한방 원료에 항노화 효과가 뛰어나고 피부 흡수율까지 높인 펩타이드(콜라겐 구성 아미노산 결합체의 일종) 성분을 결합해 ‘오클래식’ 브랜드를 선보였다. 더나드리가 지난해 출시한 한방화장품 ‘상황수’는 피부 재생, 미백 등 기능별로 상품을 특화했다.

한방화장품 시장은 2007년 8343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한방화장품은 외국 브랜드에서는 찾을 수 없는 국내 고유 시장이다. 2007년 성장률은 14.1%다. 같은 해 화장품 시장 전체 성장률(5.1%)의 세 배에 육박한다.
“1인당 국민소득 800달러인 베트남에서 770달러짜리 크림 팔았다.”(LG생활건강 김수옥 후 브랜드 매니저)

‘오휘’ ‘후’ 등을 앞세운 LG생활건강의 지난해 베트남 화장품 시장 점유율은 16%다. 98년 첫 진출한 이래 10년 만에 확고부동한 업계 1위 자리에 올라섰다. 호찌민 다이아몬드 백화점 등에 입점, 고급 화장품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지난해 말 내놓은 ‘후 환유고’ 크림(현지 가격 770달러)은 출시 한 달 만에 250여 개가 팔려 나갔다.
LG생활건강의 성공에는 한류 열풍이 큰 몫을 했다.

한류 스타들을 따라잡고자 하는 심리가 화장품에 대한 인지도를 높였다. ‘한국 화장품=고급’이라는 인식도 커져 국내 화장품 업계가 취약하다고 평가되는 브랜드 이미지의 한계를 극복했다. 2007년 KOTRA가 24개국 4260명을 대상으로 한 국가 브랜드 맵 조사에서 화장품 하면 떠오르는 국가로 한국을 꼽은 이는 응답자의 7.3%에 불과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한류 효과는 국내 화장품 업계의 든든한 후원자다. 글로벌 브랜드 경연장이랄 수 있는 홍콩에서 아모레퍼시픽의 ‘라네즈’는 랑콤·샤넬 못지않은 대접을 받는다. 한류 모델로 현지인 사이에서 라네즈는 고급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지난해 송혜교를 전속 모델로 발탁하면서 매출은 2007년 대비 18.1% 늘었다. 라네즈의 중국 내 매장은 지난해 말 현재 142개에 달한다.

라네즈의 성공에 힘입어 아모레퍼시픽은 2007년 중국 진출 5년 만에 첫 흑자를 달성했다. 앞서 일본 최대 화장품 기업인 시세이도는 중국 진출 12년 만에 첫 이익을 냈다. 라네즈는 다음 달에는 국내 브랜드 최초로 프랑스의 세포라(Sehpora) 50개 매장에 동시 입점한다. 세포라는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 그룹의 세계적인 화장품 유통 체인점이다.

“(귀찮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는 시세이도만 써요.”(전 부처 고위 공무원)
화장품 업계의 한 관계자가 지난해 말 관련 부처를 방문해 들은 말이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화가 나기보다는 차라리 서글펐다. “화장품 산업 육성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책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성의는 보여야 하는 거 아니냐. 어떻게 고위 공무원이 외국산 화장품만 쓴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나.”

그는 화장품 산업에 대한 정부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을 비롯해 장관급 회의의 주요 참석자가 대부분 남자인 것도 화장품 산업에 대한 ‘무관심’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2006년 정부가 지원한 연구개발(R&D) 예산 중 화장품 산업 몫은 39억원에 그쳤다. ‘버린 자식’ 취급을 받은 국내 화장품 산업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성장해 온 셈이다.

그나마 최근 들어 정부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전재희 복지부 장관은 지난달 화장품 공장이 모여 있는 경기도 화성 향남제약단지를 찾았다. 그는 “화장품 분야는 조금만 더 지원해 주면 제약보다 성과가 많이 날 수 있다”며 산업 육성 의지를 밝혔다.
전문 의약품은 신약 개발에만 10년 넘게 걸리고 수조원을 쏟아붓지만 성공 확률이 1만 분의 1도 안 된다. 전문의약품 매출액 상위 10위 가운데 국산은 하나뿐이며, 지난해 매출액은 748억원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화장품은 개발 기간이 2~3년으로 짧고 실패할 위험도 적다.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도 아모레퍼시픽의 경우 16%로 상위 제약사(10~11%)보다 높다.

대한화장품협회 안정림 부회장은 “전 세계 화장품 시장의 강자인 유럽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국내 화장품 업계의 시련이 예상된다”며 “친환경에 일자리 창출도 가능한 화장품 산업 육성에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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