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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의 기술, 삼성의 네트워크 ‘코리아 브랜드’로 묶어 팔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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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호 24면

한국전력과 삼성물산 컨소시엄이 카자흐스탄의 25억 달러짜리 석탄화력발전소 수주에 성공했다. 사진은 한전이 가동 중인 태안 화력 발전소.

지난 25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공화국의 수도 아스타나의 정부청사 2층 강당. 마시모프 총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전력 김쌍수 사장과 삼성물산 지성하 사장이 이 나라 국영회사인 삼룩에너지 우푸쉐프 회장과 서류 하나에 서명했다.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에서 370㎞ 떨어져 있는 발하슈 호수 연안에 25억 달러짜리 대형 석탄화력발전소를 짓기로 하는 기본협약서였다. 2014년 연간 1200~1500㎿규모로 완공될 이 발전소는 카자흐스탄에선 처음으로 정부가 아닌 민간회사들이 합작해 운영하는 민간 발전사업(IPP)이다. 중앙아시아의 자원과 인프라 개발 사업에 국내 기업이 본격 진출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카자흐 ‘발하슈 발전’ 수주 막전막후

서명식을 지켜본 두 국내 회사 실무자들과 이들을 지원해 온 정부 관계자들의 감회는 남달랐다. 한국과 카자흐스탄은 이 사업을 두고 1년 넘게 수십 차례 협상하며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다. 카자흐는 한국을 중국·일본과 경쟁시키며 실리를 한껏 챙기려 했다. 계약이 확정되나 싶으면 새로운 조건을 내놓고, 뚜렷한 이유 없이 일정을 미뤄 인내심을 시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전과 삼성물산은 ‘2인 3각’으로 호흡을 맞춰 침착하게 대응했다. 세계 수준의 기술력과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신뢰와 상생’의 메시지를 보냈다. 정부도 고비 때마다 적절한 지원사격을 하며 협상력을 키워줬다. 정은호 한전 해외사업개발처장은 “이번 수주는 정부와 공기업·민간기업의 3박자가 어우러진 ‘코리아 브랜드’의 개가”라고 말했다.
 
2년 전 삼성 주재원의 첩보가 실마리
2007년 8월 삼성물산 알마티지사의 주재원이 본사에 짤막한 보고를 보내 왔다. 현지 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친 국영 발전사 삼룩에너지의 직원에게서 ‘경제발전의 토대를 쌓기 위해 초대형 발전소를 추진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회사의 안테나가 카자흐스탄에 집중됐다. 발전사업 전문가인 한전과의 공조도 시작됐다.

마시모프 카자흐스탄 총리(뒷줄 맨 왼쪽)가 지켜보는 가운데 지성하 삼성물산 사장(앞줄 왼쪽), 우푸쉐프 삼룩에너지 회장(앞줄 가운데), 김쌍수 한전 사장(앞줄 오른쪽)이 25일 협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그해 12월 삼룩에너지 관계자들이 한전을 찾아왔다. 충남 당진 화력발전소와 경남 창원의 두산중공업 발전설비 공장을 보여주니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들이 귀국한 직후 사업에 관심이 있는지를 묻는 항공우편이 한전에 배달됐다. 한전과 삼성물산은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지난해 2월 공동으로 의향서(LOI)를 보내고 현지 조사단을 파견했다.

비포장길을 달려 도착한 발하슈의 여건은 열악했다. 옛 소련 시절 짓다 버려진 발전소와 철탑들이 메마른 대지 위에 널려 있었다. 에너지 허브로 계획됐던 도시가 인구 1000명도 안 되는 시골마을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카자흐 측의 의지는 분명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지난해 연두교서에 이 사업을 직접 언급했다. 우푸쉐프 삼룩에너지 회장은 “우리 세대가 아니라 후손을 위한 사업이니 가격보다 기술과 신뢰성을 중시하겠다”고 했다. 조사단은 ‘중국보다 가격이 비싸지만 기술력과 안정성을 생각하면 한국과 손잡는 게 장기적으론 더 이익’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두 달 뒤 우푸쉐프 회장이 방한한 뒤 협상이 본격화됐다. 5월 한승수 총리의 카자흐 방문에 맞춰 양해각서(MOU)가 체결됐다. 순조롭게 일이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카자흐는 ‘삼중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카자흐 측은 한 총리 방문 한 달 전인 4월 한국에 알리지 않고 중국과 같은 내용의 MOU를 맺었다. 비슷한 시기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미쓰이상사 컨소시엄과 또 하나의 MOU가 만들어졌다. ‘한·중·일 삼국지’를 통해 최신 기술의 발전소를 값싸게 마련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한전 컨소시엄은 정공법을 택했다. 한전의 기술과 삼성의 사업 능력으로 사업평가에서 가장 좋은 점수를 받았다. 자재부터 사람까지 모두 ‘메이드 인 차이나’를 쓰는 중국 컨소시엄과는 달리 현지인 고용을 최대화하고 기술교육을 시켜주겠다는 제안도 했다. 국영 방식이 아니라, 해외자본을 끌어들여 민자사업으로 추진하면 돈을 아낄 수 있다고 조언해 예산 조달을 걱정하던 카자흐 정부의 고민을 덜어줬다. 국경을 맞대고 있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으로 기우는 듯했던 카자흐의 태도가 한국 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지난해 7월 협상단이 변호사와 함께 카자흐로 날아가 기본협약서의 문안 조율을 끝냈다. 서명식은 대통령 보고가 끝나는 대로 하기로 했다.

한밤중에 카자흐 대통령 찾아간 MB
베이징 올림픽 개막 이틀 전인 지난해 8월 6일. 카자흐의 확약을 기다리던 한전-삼성물산 컨소시엄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어왔다. 카자흐 대통령이 “사업을 투명하게 진행하기 위해 수의계약으로 추진하던 것을 입찰로 바꾸라”고 얘기했다는 것이었다. 컨소시엄은 카자흐 측이 다 된 계약 방식을 바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데에 중국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판단했다. 카자흐 대통령의 일정을 수소문해 보니 이틀 뒤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해 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면담하기로 돼 있었다. 중국은 발하슈 발전소 사업을 따내기 위해 사업비 조달을 정부가 보증하고 10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전력투구를 하고 있었다.

기업의 힘만으론 한계가 있는 상황이었다. 지식경제부를 통해 청와대로 SOS가 날아갔다. 외교통상부가 급히 이명박 대통령과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면담을 잡아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 순간 기업인 출신인 이 대통령의 CEO 기질이 발휘됐다. 개막식 날 밤, 전격적으로 카자흐 대통령 숙소를 방문했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삼성은 세계 최고 기업 가운데 하나이고, 한전은 전력 분야에서 최고의 기술력을 갖고 있다. 한국 정부도 사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 방문 뒤 한 달여간 중단됐던 협상이 재개됐다.

11월 중순 우여곡절 끝에 기본협약서의 내용이 완성됐다. 하지만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심화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계약 체결의 또 다른 걸림돌로 떠올랐다. 카자흐 측이 컨소시엄의 자금 확보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외환사정을 들어 중국이 다시 움직인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이런 우려는 올 1월 현실화됐다. 카자흐 측이 한국과 중국 컨소시엄 대표를 함께 호출해 중국과 한국이 사업을 절반씩 맡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1년여를 끌어온 협상이 다시 물거품이 될 위기였다. 고민 끝에 컨소시엄이 내놓은 대답은 ‘노’였다. 기술과 경영 수준이 다른 중국 기업과 지분을 나눠 가지면 사업성이 떨어질 게 뻔했다.

발전사업의 효율성이 떨어지면 카자흐에도 득 될 게 없었다. 정부도 총리 친서를 보내 컨소시엄의 입장을 뒷받침했다. 카자흐도 이를 수긍한 듯했다. 2월 말 기본협약서가 최종 마무리됐다. 3월 17일 서명식을 하자는 합의도 이뤄졌다. 하지만 날짜가 다가와도 카자흐에선 아무 소식이 없었다. 승부수가 필요했다. 지난 19일 현지로 날아간 이철우 삼성물산 부사장이 “카자흐 대통령이 방한하는 5월에 맞춰 서명하자”고 제의했다. ‘우린 급할 게 없다’는 메시지가 담긴 역공이었다. 다음 날 귀국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 이 부사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총리가 빨리 하라고 했으니 25일 서명식을 하자”는 삼룩에너지 관계자의 전화였다.
 
원전 수주, 우라늄광 지분 참여 기대
이번 수주는 개도국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진출 때 정부와 공기업·민간기업의 역할 분담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줬다. 삼성물산은 92년 알마티에 지사를 열어 17년간 카자흐에서 기반을 닦아 왔다. 특히 95년 파산 상태였던 국영 동제련업체 카작무스의 위탁경영을 맡아 지속적인 투자와 혁신으로 조기에 정상화시켰다. 현재 10개의 동 광산과 2개의 석탄광산, 3개의 발전소 등을 갖고 있는 이 회사는 연산 40만t의 생산 능력에 6만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세계적 동 생산업체다. 삼성물산의 현지 네트워크와 정보력은 컨소시엄이 발하슈 발전소 사업 정보를 입수하고 고비 때마다 현지 분위기에 맞게 발 빠르게 대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한전의 기술력은 카자흐에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발전소 가동률이 가장 높으면서도 정전시간과 송배전 손실률은 가장 적은 나라다. 96년 필리핀 일리한 발전소, 2008년 중국 산시성 발전사업 등 해외에서 민자발전사업을 해온 경험도 풍부하다. 한국과 중국에 밀리게 된 일본 컨소시엄은 막판에 여러 차례 자신과 손잡자는 제의를 한전에 해오기 했다. 정부도 대통령과 총리가 정상회담과 총리회담, 전화와 친서 등으로 각각 대여섯 차례씩 카자흐 고위층을 접촉하며 자기 일처럼 발벗고 나섰다. 이번 수주 성공으로 앞으로 카자흐의 원자력 발전소 수주와 우라늄광 지분 인수에도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게 됐다. 김석원 삼성물산 프로젝트팀장은 “국내 종합상사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한전의 기술력이 잘 어우러지고 정부의 지원이 더해지면 개도국의 발전·에너지 SOC 사업 수주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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