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원조를 찾아서] 인천 차이나타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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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구 북성동 차이나타운의 중국음식점 거리. 1880년대 중국 상인들이 들어와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800여 명의 화교가 모여 살고 있다. [인천관광공사 제공]

인천항에서 자유공원 방향으로 걷다 보면 거대한 솟을대문(패루)이 나타나면서 마치 중국에 건너 온 듯한 느낌을 주는 거리들이 이어진다. 단일 혈통을 자랑해 온 나라에서 외국인 집단 거주지의 효시로 꼽히는 ‘인천 차이나타운’이다.

인천 중구 북성·선린동 일대 11만4000㎡ 넓이의 타운 내부는 온통 중국 풍경이다. 중국식 대문인 패루의 화려한 색상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차이나타운의 상징이다. 성(城), 루(樓), 관(館)이라는 이름의 중국음식점이 25곳에 이르고 중국 기념품 가게와 소규모 무역상들도 20여 곳이나 된다. 110여 년 역사의 중산학교(화교학교)와 중국식 절인 의선당, 공자상도 이국 정서를 자아낸다. 삼국지의 160개 장면을 타일 벽화로 보여주는 삼국지 벽화거리, 중국식 지붕을 한 한중문화관, 한국인들이 하루 700여만 그릇을 먹어 치운다는 자장면의 발상지(공화춘)도 이곳에 있다. 화교 3세인 손덕준(53·孫德雋) 상가연합회 회장은 “역사의 부침으로 한때 황폐화된 적도 있었지만 앞으로 미국이나 캐나다의 차이나타운 못지않게 번창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임오군란(1882년) 때 위안스카이 군대를 따라 건너 온 40여 명의 중국 상인들이 청국 조계지(租界地·외국인이 자유로이 거주할 수 있도록 설정된 외국인 전용 주거지역)에 둥지를 틀고 특유의 상술로 무역과 음식업에 종사하면서 번성해 나갔다.

한일합병으로 조계지가 폐지되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한때 기세가 꺾이기도 했으나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대체로 성장세가 지속됐다. 필명안(58·畢明安) 인천화교협회 회장은 “한때 타운 내 화교가 1만 명에 달해 ‘한국말이 필요 없다’고 할 정도의 자족사회를 이뤘다”고 회고했다.

한국전쟁으로 중국 대륙과 단절되고 토지소유까지 제한되자 화교들은 미국·동남아 등지로 대거 빠져 나갔다. 10여 년 전 인천 차이나타운 활성화 사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200여 명에 불과했다. 최근까지도 인천 사람들은 이 지역을 ‘청관(淸館)’이나 ‘중국동네’로 불러 왔다. 현재는 중국에서 유입된 중국인들을 합해 800여 명으로 늘어나 있다. 인천 지역 향토사학자 조우성씨는 “120여 년 역사를 가진 인천 차이나타운의 앞날은 다문화사회의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정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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