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금융가 '정치인 청탁 외풍' 속앓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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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최근 금융가에는 '정치인들 때문에 죽겠다' 는 푸념이 확산되고 있다.

한보사건 이후 한동안 뜸했던 '금융계 청탁' 이 또 다시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정권 말기의 레임덕 현상속에 은행.증권등 금융기관에 인사.대출 관련 민원이나 청탁이 쇄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부실채권 증가.신인도 추락등으로 만신창이가 된 마당에 청탁외풍마저 밀어닥쳐 전화받기조차 고역이라는 푸념이다.

역시 정치권으로부터의 청탁이 대부분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크고 작은 청탁전화나 메모가 은행장실로 몰려 온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A시중은행장에 따르면 "한보사건으로 정치권의 청탁이 눈에 띄게 줄었었는데 최근들어 부쩍 늘고 있다.

어떤 야당의원은 '정권이 바뀌면 보자' 는 식으로까지 협박을 한다.

특정 기업에 대출을 부탁하는 일부 의원들은 대뜸 은행장을 찾아와 '해당 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어라' 며 윽박지르기도 한다" 고 어려움을 털어 놓았다.

금융계의 그릇된 관행때문에 야박하게 거절하기 어려워 성의는 보이지만 시간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게 그의 설명이다.

◇ 대출 관련 청탁 = 후발은행인 B은행장은 최근 담보로 잡은 부동산의 경매 시기를 늦춰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은행으로서는 부실채권정리를 위해 하루빨리 경매에 부쳐야 하는데 부실기업 부탁을 받고 담보물 처분을 늦춰달라는 청탁이 최근 부쩍 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간 큰 부실기업회장은 "아무개 캠프에 깊숙이 간여하고 있다" 는 점을 내세우면서 거래 금융기관에 대출압력을 넣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돈다.

가장 많은 케이스는 부도위기에 놓인 기업관련 사항들. 최근 화의신청을 내놓고 있는 H.S기업들의 경우 관련 종금사들은 국회나 당국자들로부터 '협조요청' 전화를 안받아본 사장들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말한다.

마침 국회가 개회중이라서 금융기관들로서는 청탁에 더욱 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기관마다 차이가 있다.

주인이 확실한 후발은행에는 예나 지금이나 청탁의 발길이 뜸한 편. 문제도 많지 않을뿐 아니라 청탁을 해 봤자 잘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한 후발은행장은 "요즘은 청탁이 거의 없는 편" 이라며 "은행이 만신창이가 된만큼 청탁이 들어온다 해도 들어줄 수 없다" 고 잘라 말했다.

◇ 무리한 인사청탁 = 어떻게 하면 감원을 하느냐는 판에 인사청탁이 쇄도해 곤욕을 치르고 있다.

D증권 사장은 "파생상품 분야의 전문가를 뽑고 있는데 증권사를 퇴직하고 농사를 짓던 30대 중반을 채용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며 불만을 터뜨렸다.

신입사원 모집은 더하다.

S증권 인사담당 관계자는 "10명 모집에 2천명이 몰려들어 형식적으로는 경쟁률이 2백대 1이지만 청탁으로 미리 정해지는 인원을 감안하면 실제 경쟁률은 훨씬 높아진다" 고 꼬집었다.

박장희·김동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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