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의 필름 앤 필링] 현실감각 없는 우리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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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벌써 몇년 째인지 모른다.

한국 영화에는 전선 (戰線) 이 없다.

이견이 드물고, 있다 해도 논쟁이 없다.

무엇보다 접점을 끌어낼 만큼 치열한 영화, 진지한 작가의 정신이 없다.

세계의 다른 면을 보여주려는 실험 의지는 물론 당대의 삶을 온전히 드러내려는 그 어떤 고투.열정.지혜가 없다.

그 삭막한 풍경을 채우는 건 눈치보기에 바쁜 영화들, 들리는 건 그 바쁜 영화에 기생한 이들의 수다뿐이다.

아마 한국 영화사에서 오늘처럼 창작이 무력하고 비평이 자기 논리없이 허투루 돌아다니던 때도 없으리라. 지금 한국 영화의 첫째 가는 이데아는 흥행이다.

현장의 영화인들은 만날 때마다 흥행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거대 자본이 투자되는 대중 예술에서 어느 누가 제작비 환수를 염려하지 않겠는가.

한데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의 공통된 얘기는 이러하다.

"한국 영화는 시시하다.

재미도 감동도 없다.

" 무슨 말인가.

흥행을 위해, 장사를 위해 만든 영화가 흥미를 끌지 못한다?

너나없이 돈을 벌기 위해 만든 영화의 9할 이상이 번번이 시장에서 외면당한다는 사실은 깊이 생각할 일이다.

우리 영화인이 대중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외에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을까. 어떤 이는 관객을 탓하기도 한다.

할리우드 영화에 중독돼 있다고. 우리 영화를 무시한다고. 이런 생각은 아무런 알리바이가 되지 못한다.

'접속' 에 몰리는 관객이 영화사 추산으로 1백만명을 넘어섰다.

멜로드라마라서? PC통신이라는 소재의 신선함 때문에?

이건 핵심이 아니다.

관객들은 우리의 일상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현실을 어느 정도라도 (!

) 진솔하게 그린 한국 영화를 그토록 고대했던 것이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흥행이라는 현실을 직시하라 말하지만 실제로 제작진을 위시한 영화인들은 우리의 현실을 옳게 보지 못하고 있다.

현실 감각의 부재, 한국 영화의 긴급한 화두는 이것이다.

주제 의식은 현실 감각의 바로 곁에 있는 사안이다.

진정성, 혹은 생활에 기반한 고민은 그것의 다른 이름이다.

예컨대 왜 지금 창부이야기를 꺼내는지, 여관방을 전전하거나 갖은 폼을 다잡고 파리의 뒷골목을 헤매고 다니는지, 여전히 깡패를 불러 모으는지를 그들의 영화는 대답해주지 않는다.

나는 정말 궁금하다.

이런 영화는 우리 현실의 어느 면과 상관하는가, 어떤 의미가 있나, 무얼 말하는 건가.

신인이건 중견이건 노장이건 간에 도대체 저 수많은 우연적 상황과 억지스러운 대사, 허공에 붕 뜬 인간형을 버젓이 내놓고 탐미적이기만 한 영상에 저리도 몰두하는 까닭이 무언가.

자신의 주제를 찾지 못한 감독들을 위해 영화 관련 매체들이 마련한 변명의 자리는 더 볼썽 사납다.

"폭락한 주가보다 더 참담하게 무너져내리는 우리 영화계의 실정을 이해하건대 어찌 비판하랴" 고 항변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영화의 처지가 안쓰럽다면, 정글의 법칙에 희생될 미래가 정녕 걱정스럽다면, 정직하게 토로할 수 있어야 한다.

얼마나 법칙을 모르는 영화인지, 무지한 영화인지를. 우호적인 해석? 올해의 한국 영화를 둘러보건대 그건 아부요 영합이요 대중 추수에다 대중 오도일 따름이다.

한번 들춰보라. 오도된 비평 문화, 그 밀월의 현장이 단평과 기사와 인터뷰 행간에 차고 넘친다.

이대로라면 십년 뒤 뭐가 남을지. 점성술사 혹은 카피라이터쯤 될까.

김정룡 <영화평론가>

<약력>

약력 1964년 서울생. 숭실대 독문과, 동국대 대학원 연영과 석사졸, 계간 '리뷰' 편집위원, 저서 '우리 영화의 미학' (문학과 지성사) , 홍익대.상명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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