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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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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의 탄흔이 잦아든 1950년대 독일. 소년 마이클은 우연히 알게 된 여인 한나에게 충동적으로 이끌리며 육체 관계를 가진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한나가 마이클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 섹스 전에 책을 읽어달라는 것이다. ‘오디세이아’ ‘채털리 부인의 사랑’ 등 유수의 고전을 읽어주며 관계에 흠뻑 빠져 있던 마이클은, 어느 날 갑자기 한나가 종적을 감추자 깊은 상처를 받는다. 8년 후 법대생이 된 마이클(랠프 파인스)은 재판에 참관했다가 홀로코스트의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그녀를 목도한다. 자신의 죄를 부정할 근거가 있음에도 감옥행을 택하는 한나(케이트 윈즐릿). 마이클은 다시금 책을 낭송하며 그 녹음테이프를 감방으로 보낸다.

독일 법대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대표작을 스크린에 옮긴 ‘더 리더’는 전쟁 세대를 회고하는 전후 세대의 딜레마를 사려 깊게 다룬다. 개인 간의 육체적·감성적인 소통은 역사적 무게 앞에서 나약하게 마련이다. 그러면 세대가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방법은? 영화는 ‘책 읽어주기’라는 행위에 거듭 무게를 더해준다. ‘문맹’에 가까웠던 지난 세대는, 그러나 우리에게 ‘책’이라는 지혜의 축적을 남겼다. 희랍 시대의 ‘오디세이아’가 지금껏 전해져 온 것은, 세대를 뛰어넘는 독자의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시대의 부채감을 극복하는 길은, 타인을 위해 다음 세대를 위해 이 지혜의 보고를 거듭 읽어주고 들려주는 것인지 모른다. 나치의 만행을 환기시키기 위해 1995년 원작 소설이 쓰여지고 2008년 이 영화가 만들어진 것처럼.

‘빌리 엘리어트’ ‘디 아워스’에서 섬세한 감정의 흐름을 탁월한 영상미로 직조했던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이번에도 빼어난 호흡조절을 보여줬다. 한나의 복합적인 감정을 얼굴 근육의 미세한 떨림으로 담아낸 케이트 윈즐릿은,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동시 석권이 아깝지 않다. 흠이 있다면 흘러넘치는 품위 탓에 일자무식의 여인조차 광채가 나더라는 것. 그래서 ‘추리’가 어렵다면 그 또한 빼어난 연기인 걸까.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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