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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마차 어제와 오늘…소박한 밤주막서 길살롱·포장트럭·레스토랑 변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골목길 모퉁이 돌아서면 언제나 그곳에 똑같은 모습으로 있어 온 것 같은 주점. 그러나 '한국적 술집의 대명사' 포장마차도 우리네 삶의 굴곡을 따라 무시로 변해 왔다.

전쟁으로 헐벗었던 50~60년대 청계천등지에서 광목으로 윗도리만 겨우 가린채 참새구이에 잔소주를 팔던 포장마차는 70년대에 접어들며 비로소 요즘의 모습과 비슷해졌다.

김 오르는 어묵국물에 닭똥집이랑 꼼장어, 옷핀으로 찔러 먹는 해삼따위 먹거리가 갖춰졌고 변두리와 역주변등 틈이 있는 곳엔 어김없이 들어섰다.

3~4평 남짓한 공간에 카바이트 불빛이 흔들리고 일자 (一字) 의자에 참새처럼 나란히 앉거나 선 채로 술을 마셨던 '주머니 허전한 사람들의 스탠드빠' 가 되어 주었다.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80년대에 이르러 포장마차도 획기적인 변신을 했다.

백열전등과 냉장고.녹음기가 들어오고 비디오 시스템을 도입해 술도 먹고 쇼도 볼 수 있게한 '극장식 포장마차' 도 선보였다.

도심 입성에도 성공해 건조한 빌딩 사이를 안주 굽는 냄새로 적셨고 고객도 70~80%가 회사원이나 학생으로 바뀌었다.

퇴근길 딱 한잔을 외치는 '한잔파' 나 이곳저곳 안주맛을 보고 다닌다는 '포마돌이' ,끝장은 꼭 포장마차에서 본다는 '막장파' 등이 등장했다.

88년 올림픽을 전후한 시련기를 겪기까지 포장마차는 '마차' 수준을 넘어서 테이블까지 들여놓은 30~50평 규모의 '길살롱' 이 되는등 영화를 거듭했다.

그러나 귀한 손님 모시려는 높은 분 눈엔 쓰레기처럼 보였는지 황야의 수호자 존 웨인도 없이 인디언도 아닌 불도저 습격을 받아 미사리.석촌호수등지의 포장마차촌은 쑥대밭이 되고 만다.

하지만 애초부터 법의 해방구였던 포장마차는 법으로 사라지지 않았고 심야영업금지조치에 힘입어 과거의 영화에 못지 않은 번성을 누리기도 한다.

지금은 신촌이나 종로.방배동등지를 제외하곤 집단으로 모여있는 곳이 많지 않다.

'마차' 가 아닌 '포장트럭' 이 되면서 굳이 한자리에 붙박혀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반면에 수족관까지 실고 다닐 만큼 장보따리가 커져 메뉴는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산낙지·한치회·조기매운탕·오돌뼈·닭꼬치·파전·빈대떡등 어류·육류를 불문한 각종 구이와 탕·볶음에 우동·자장면·김밥등 식사메뉴까지 제공하는 백화점이 되었다.

최근 포장마차는 일산이나 분당등 신도시와 서울의 목동등 대규모 주거지역을 개척했다.

자가용이 일상화돼 술꾼들이 집근처에서 한잔 걸칠 수 있는 곳이 절실해졌기 때문.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포장마차가 '패밀리 레스토랑' 이 되기도 한다.

소주 한잔에 나누는 부부간의 정담에 야간학습 마치고 돌아온 출출한 아이들이 합세해 21세기 포장마차를 연출한다.

포장마차가 피자와 햄버거를 좋아하는 신세대들에게도 닭똥집과 꼼장어 같이 쫀득쫀득한 인생의 맛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변해도 닭똥집과 꼼장어, 그리고 인정 없는 포장마차야 상상할 수 없을 테니까.

양지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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