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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마차, 고단한 일상의 간이역…그 반쯤 열린 풍경 속으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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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그 곳에 가면 따뜻하다.

쌀쌀한 계절, 바람 맞으며 쓸쓸한 마음들이 가는 곳. 반은 사나이 벌판같은 가슴처럼 열리고 반은 냉랭한 첫사랑 여인의 마음처럼 닫힌 주막, 포장마차. 그 곳에 가면 필라멘트가 빛을 밝히는 알전구가 있고 그 불빛을 더욱 뽀얗고 아련하게 하는 추억 같이 김이 피어오르는 국물이 있다.

그리고 안주 굽는 냄새가 있고 그 냄새 사이를 오가는 사연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연들을 전생의 인연인냥 끈끈하게 맺어주는 술이 있다.

“골목에서 골목으로/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순하디 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밤은 깊어가는데,”

평생가난과 술과 시로만 살다간 시인 천상병은 '주막에서' 라는 시에서 '저녁 어스름' 을 '시인의 보람' 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스름이 차곡차곡 쌓이는 '술시' 가 어찌 시인만의 보람이겠는가.

삶이 따라지 같이 서럽고 억울한 사람들에게도 비로소 몽롱한, 해서 장엄한 은총이 내리는 시간 아니겠는가.

자꾸 한 잔 더 달라며 술 기운이 서툰 걸음처럼 쌓여가는 포장마차의 밤. 주막에는 '우리는 결코 남이 될 수 없다' 라는 공동체의 유대가 있다.

그리고 중년을 넘겨 온갖 사연에 닳은 인심 좋은 주모가 있다.

그래 주막은 고향집 툇마루 같다.

포장마차에는 근대적 삶이 아무리 고달퍼도 인간적 유대만은 지키고픈 갈망이 있다.

다 뜯기고 거덜난 고향산천과 인심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남인가' 라고 묻고 싶은 인간적 갈등이 있다.

떠나온 곳은 아득하고 가서 머물고픈 정처는 보이지 않는 간이역. 과거와 미래의 2중 결핍의 현재. 그 황량한 벌판에 포장을 친 주점이 포장마차다.

포장마차는 일단 우리의 굴곡된 근·현대사의 외양을 띤다.

옛집들은 뜯기면서 브로크 슬라브 집들이 들어 서고 있는 공터. 기차역이나 버스 종점의 그늘진 곳. 그 허가 없는 땅에 허가받을 수 없는 리어커가 들어와 포장을 쳐 눈.비.바람 막는 곳. 그곳에는 일단 근.현대사에 밀려난 사람들이 모였다.

멸치국물이 부글부글 끓는 곳. 오징어도 꼴뚜기도 데쳐낸 그 뜨거운 국물에 싸늘한 국수 한다발 말아 종일 주린 속을 데우려는 근대화에서 밀려난 근대화의 역군들, 그 국물같은 존재들이 포장마차를 찾았다.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줌마 뜨거운 국물 한 국자만 더 주세요” 라는 말도 못붙이고 눈치만 겸연쩍게 살피다 그들은 돌아갔다.

떠밀린 고향 따뜻한 아랫목을 꿈처럼 그리며 그렇게. 삶과 직장이 못내 서러운 동료들도 술을 핑계 삼아 한풀이 이야기를 하려 포장마차를 찾는다.

닭똥집이나 꼼장어 한 접시 앞에 두고 소주를 몇 병씩 마셔대며 하는 이야기. 흔히 직장 상사가 몇접시의 안주로 더 올라 '씹히고 또 씹힌다' .아무런 죄 없이 아무 죄 없는 상사를 향한 험담. 포장마차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값비싼 술집에서의 오가는 밀담과는 다르다.

이야기는 아까운 안주 한점처럼 맛있게 소화되어 구린내를 풍기지 않는다.

같은 주점이면서도 반쯤 열린 술집인 포장마차는 또 뭔가를 버리고픈 사람들이 찾는다.

세상에 아무 것도 쌓을 수도 없고 쌓기도 싫은 사람들이 마음에 캥긴 것들을 풀기 위해 홀로 찾는다.

그 때는 홀로이면서도 홀로가 아니다.

골방에서 소주로 풀지않고 왜 포장마차를 찾겠는가.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놓고 풀어버리려는 공개된 외로움들이 찾는 곳이 포장마차다.

모두 바람 같은 사람들. 정처가 없기에 떠돌고픈 마음들이 포장마차를 찾는다.

인생이란 정형이 아니라 끝없이 구르고 구르는 것이라는 대범한 사람들이 찾는 술집, 그곳이 포장마차가 아니었던가.

그래 끝이 안보이는 삶, 답답한 일상일지라도 잠시 숨한번 크게 들이쉬고 쉬어가는 공간이 포장마차 아니던가.

가진 것을 지키고픈 사람,가난하고 쓸쓸하지 않은 사람, 나는 나라고 외치는 독불장군들은 감히 들어설 꿈조차 꿀 수 없는 곳에 포장마차는 위치한다.

그래 삶과 사회를 비틀거릴지라도 인간답게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마음 막다른 골목에 열려 있는 포장마차는.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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