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전직과 현처의 역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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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미국 대통령 부인 힐러리 여사가 지난 일요일 50세 생일을 맞았다.

그 다음날 힐러리는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카고를 찾았다.

살던 집과 초등학교를 방문했고 고교시절 남자동창생들과도 만났다.

집권2기를 맞은 남편 클린턴이 역사에 이름남길 대통령을 꿈꾸며 호흡 긴 정책개발에 매진하는 마당에 부인의 발걸음도 한결 바빠졌다.

어린이 복지문제에 대한 관심을 제기하기 위해 각종 방송에 출연하고 세계 각지를 순방하며 대통령의 외교활동에도 일조하고 있다.

역대 미 대통령 부인 가운데 가장 똑똑한 여성에 속하는 힐러리는 내용있는 메시지를 전파하느라 분주하다.

바쁜 영부인의 활동을 보는 미국민들의 인식도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다.

힐러리에 대한 인기도가 60%에 임박해 요즘 미 대통령 내외는 정책홍보에 신명나 있다.

영부인이 너무 설친다는 지적 때문에 지난해 선거전 당시만 해도 몸사리던 힐러리에 대한 지지가 다시 상승하는 것은 역시 '잘난 여성' 에 대한 미국민들의 인식과 관용에서 비롯된다.

한편 클린턴 대통령이 중시하는 정책과제 가운데 '패스트 트랙' (신속협상권) 과 관련, 전직 관리들이 주요 일간지를 통해 지지입장을 천명하고 나섰다.

지난 대선에 클린턴에게 도전했던 공화당 후보 봅 도울 상원의원과 클린턴 집권초 재무장관을 지냈던 로이드 벤슨이 공동기고에서 현정부의 정책을 지지한 것이다.

도울 의원과 벤슨 장관은 전직 상원의원들로서 소속정당은 다르지만 모두 의회 재무위원장을 지냈던 이들이다.

당적 (黨籍) 과 무관하게 특정 사안에 대한 입장이 같다는 이유로 전.현직 관리들이 공동기고하는 경우는 흔히 있다.

미국의 전직 공직자들은 대개 워싱턴을 떠나지 않고 법률회사의 자문역을 맡거나 정책연구기관에 몸담고 간접적이나마 정책결정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언론매체를 통해 입장을 정정당당히 밝히며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한다.

소속정당의 경계를 넘어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공동보조를 취하는 것이 이곳에선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한국에선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들의 부인들이 국내 언론을 타고 있지만 똑똑한 여성, 잘난 여자의 모습을 내비치는 것이 득될 것 없다는 생각들인 모양이다.

그리고 상당수의 전직관리들은 새로운 대통령을 기다리며 뚜렷한 입장표명 없이 눈치보기에만 급급하다.

잘난 부인과 입장 분명한 참모를 가진 대통령이 우리에겐 요원한 것 같다.

길정우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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