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입시 충격파 던진 권명광 홍익대 총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2013년부터 홍익대 미대 입시에서 실기고사를 폐지하겠다.”

지난 11일 권명광(67ㆍ사진) 홍익대 총장의 ‘깜짝 발표’는 미대 입시시장 뿐 아니라 미술계를 놀라게 했다. “내가 활동하던 독일서도 미대는 실기가 중요했다. 실기고사 완전 폐지는 불가능할 것”(독립 큐레이터 류병학), “우리나라 미대 입시의 문제를 해소하려면 개혁으로는 어렵고 혁명이 필요하다. 홍익대의 결단을 환영한다”(미술평론가 이주헌) 등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심지어 “자꾸 입시비리가 불거지니 내놓은 고육지책인가”라는 비판도 나온다.

2009학년도 홍익대 신입생 정원은 조치원 캠퍼스를 포함해 966명이며, 여기에 총 7758명이 지원해 8대1의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 학교의 미대 입시안에 전국 미대 지망생들의 희비가 엇갈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서 홍익대 총장실을 찾아갔다. 권 총장은 세간의 반응을 의식한 듯 “실기고사를 폐지하겠다는 것이지 대학에서 실기 교육을 안 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실기고사 폐지는 미술의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고 미대 입시 사교육의 폐단을 막을 대안”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또한 “홍익대 미대의 신입생 정원은 입학사정관 제도를 일부 도입하는 카이스트 전체(850여명)보다 많다. 국내 최대 규모의 미술대학으로서 문제점이 많은 미대 실기고사의 개선에도 앞장서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일문일답.

-실기고사 폐지안을 발표한 목적이 뭔가.

“영역간 해체, 장르의 통합, 문화적 감성의 시대다. 미대 지망생들은 대개 중학 3학년부터 4년간 화실에 앉아 매일 4시간 이상 석고 데생을 연습한다. 시대착오적이다. 이건 기능인 양성이지 예술인 양성이 아니다. 입시준비의 폐단을 줄여 미대 지망생이 여러 분야에 폭넓은 소양을 갖추고 입학하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취지는 좋지만 과연 제대로 될까.

“고교 미술교육 개선이 전제돼야 하겠지만 우리는 일선 고교의 평가를 존중할 방침이다. 고교 3년간 학생의 미술교육 참여도(학생부)와 학생의 열정(면접), 학력기준으로서 수능성적으로 미대생을 뽑을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예술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도록 해왔다. 입시 경쟁에 밀려 예술의 역할이 퇴색되고 있다.”

-미술에서는 머리 뿐 아니라 손도 중요할텐데, 미대 지망생이라면 미술의 기본 자질은 갖추고 들어와야 하는 것 아닌가.

홍대 미대 입학 실기시험 공개 채점 장면. 서양 석고상을 데생한 답안이 기능공의 그것처럼 똑같다. [중앙포토]


“기본기는 여전히 중시한다. 다만, 입학 후 철저히 가르칠 것이다. 이는 입시학원의 데생 교육과는 다르다. 공대에서 뽑는 건축학과를 생각해보라. 건축학 역시 미술의 기본기가 필요하지만 입시로 가르지 않고 대학에서 가르친다. 재료가 달라진 시대다. 입시 때 쓰는 포스터칼라만 해도 입학 후엔 안 쓴다. 아이디어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실현하는 시대다.”

-국내외 다른 미대의 선발방식은.

“서울대의 경우 포트폴리오 제출을, 경원대는 실기고사장에서 주제를 주고 이에 대해 표현하게 하는 방식을 병행한다. 그러나 포트폴리오 대행업까지 성행하는 실정이다. 우리 역시 실기고사의 틀 안에서 다양한 변형을 시도해왔다. 암기식 석고데생을 막기 위해 석고상을 뒤집어 놓기도, 석고상에 흰 천을 씌우고 그리게도 해봤다. 이같은 석고 데생은 19세기 프랑스 아카데미 교육이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을 21세기까지 고수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미국의 경우 포트폴리오 제출이 많다. 우리나라 미대 입시의 걸림돌은 치열한 경쟁이다.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어떤 변화를 줘도 사교육계에선 이를 뚫을 편법을 끝없이 개발하는 것이다.”

-그래도 폐지까지 간 것은 성급하지 않았나. 실기고사는 유지하되 반영비율을 줄이는 등의 점진적 방안도 고민해봤을 법 한데.

(서종욱 입학관리본부장) “지원 학생들의 분포는 일정하다. 고만고만한 내신과 수능 성적의 학생들이기 때문에 실기고사가 당락을 좌우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실기고사의 반영비율을 현행 40%에서 10%로 대폭 낮춘다 해도 수험생들이 체감하는 반영비율은 크게 다르지 않을거라 본다.”

-이번 발표가 최근 몇 년간 연달아 불거진 입시 비리 때문이라고들도 한다. 특히 2009학년도 입시 비리에 대해서는 검찰 수사가 진행중이다.

(서 본부장) “1961년부터 도입된 실기고사는 사실 대학이 포기하기에는 너무도 편리한 입시 방식이다. 창의성을 저해하며, 그림 기계를 만든다는 수십년간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존속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다. 입시비리 문제 때문에 실기고사를 폐지한다는 것은 입학 전형에 익숙치 않은 이들의 생각인 것 같다.”

-2009학년도 미대 학부ㆍ대학원 입시 비리는 학내 조사 결과 두 교수가 각각 2개월 정직, 2개월 감봉의 징계를 받는 선에서 그쳤다. 대학측에서 서둘러 덮었기 때문에 이같은 관측이 나오고, 검찰 수사가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검찰에 문의한 결과 구체적인 혐의가 나온 것은 아니고 일단 조사 단계라고만 하더라. 입시란 것은 우리 사회에서 워낙 민감한 문제이며, 홍익대 미대의 규모와 위상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교수가 징계에 회부됐다는 것 자체가 치명적 문제이기 때문에 경징계냐 중징계냐 하는 논란은 불필요하다고 보며, 입시 관련 자료는 수십년치 보관하고 있으므로 언제든 제공해 수사에 전적으로 협조할 의향이 있다.”

-문제는 새로운 입시 제도가 더욱 객관성이 떨어지고 잡음 소지가 많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올해 일단 자율전공학생 71명을 석고 데생 없이 뽑아봤다. 이들은 2학년 때 전공을 정한다. 50분짜리 간단한 선묘 테스트로 평소의 관찰력을 살폈고, 이를 토대로 두 차례의 면접을 봤다. 학생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미술에 대한 생각과 관심사를 나눌 수 있어서, 천편일률적인 암기식 실기고사 채점보다 교수들 반응이 좋았다. 현재 홍대엔 입학사정관이 세 명 있는데 한 명은 미술학 박사 출신이다. 앞으로 인원을 충원할 계획이며 학생부나 면접 평가 방식의 표준화 작업 등도 진행중이다.”

-교육부에서 입학사정관 제도를 지원하니까 대학들이 다투어 이에 부응하는 입시제도를 발표한다는 비판도 나오는데.

“교육은 백년대계다. 예산을 지원받기 위해 대학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렇다면 홍대 미대를 지망하는 학생에게는 어떤 준비를 하라고 당부해야 할까.

“사교육 시장에서 앞장서서 연구할 것이므로 이 자리에서 섣불리 발표할 수는 없지만, 시기가 되면 혼란이 없도록 안내하겠다.”

(서 본부장)“한마디로 ‘학교에 충실하라’다. ‘학교의 미술 관련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해 네 능력을 보여라’라고 말하고 싶다. 가령 자연계 지망생은 학교 교육에서 특히 수학에 두각을 나타내고 이것이 학생부에 반영되지 않나.”

-한국 미술계는 서울대와 홍익대 졸업생들이 양분한다는 얘기가 있다. 특히 서울대는 이론에, 홍익대는 실기에 밝다고들 한다. 실기고사 폐지는 홍익대의 이같은 특성을 무화하고 이도저도 아닌 학교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서울대가 대학로라는 문화지구에 있었고, 지금의 홍대 앞이 허허벌판이던 20년 전 얘기다. 지금은 대학간 특성이 많이 평준화된 때다. 또한 서울대 미대 정원은 홍대 디자인학부 정원보다 적을 정도로 소수라 수능성적만으로 비교할 수 없다.”

-홍대 미대에서 요구하는 우수 학생은.

“미술에 소양이 있는 학생과 실기고사에 훈련된 학생은 다르다. 우리가 바라는 인재는 미술에 잠재력 있는 사람들, 미술에 평생 전념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반 고흐는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고, 폴 고갱은 30대까지 증권맨으로 일하다가 화가가 됐다. 어느 대학이나 우수 학생을 뽑고 싶은 욕심이 있을 것이다. 이불(45)ㆍ전광영(65) 씨처럼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예술가가 졸업생 중에서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

-홍익대 앞 상권의 핵심은 미대 입시교육 시장이다. 이 학교 학생들이 등록금 벌이를 하는 곳이기도 하고, 심지어 이 학교 교수들은 입시철에 특강을 나가 몇백만원씩 받는다는 소문도 있다. 실기고사 폐지의 직격탄을 맞을텐데.

“안그래도 교수들에게 아는 학원장들이 문의 및 항의를 한다더라. 그러나 대의가 중요하지 대학이 사교육 시장을 걱정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학생들이 학교 앞 입시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큰돈을 손쉽게 벌어봐서 졸업 후 건실하게 취직하는 걸 경시하는 경우를 한탄한다. 또한 예술엔 어느 정도 헝그리 정신이 필요한데 사교육 시장이 그런 걸 저해하는 면도 있다.”

-한국 미술계를 주름잡는 홍익대 미대의 강점은 뭐라고 자평하나.

“그것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다. 당대의 쟁쟁한 작가들을 모아 일찌감치 미대를 대규모로 특화한 발상 자체가 독특했다. 김환기ㆍ이대원ㆍ이상범 등으로부터 배운 인재들의 사회활동이 대학의 명성을 높였다. 그렇게 되니 이제는 유능한 학생들이 들어오게 됐다. 때문에 미술 사교육의 폐해를 앞서 막아야 할 의무도 있다고 본다.”

글= 권근영 기자, 사진= 김경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