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높아지는 보호무역주의 ‘바벨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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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지난해 11월 15일 미국 워싱턴DC에 모인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은 “보호무역 조치가 규정에 맞더라도 앞으로 1년간 투자와 상품·서비스 무역에서 새로운 장벽을 쌓는 것을 자제하겠다”고 약속했다. 1930년대 대공황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워싱턴 정상회의의 약속은 공수표인 것으로 드러났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정상회의 이후 4개월여 만에 G20 중 17개국이 47개의 새로운 무역장벽을 쌓았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 침체가 깊어지면서 무역장벽이 높아지고 있다고 뉴욕 타임스(NYT) 인터넷판이 23일 보도했다. 다음달 2일 런던 G20 금융정상회의에서도 자유무역 원칙을 다시 천명할 전망이나 말과 행동이 일치할지는 미지수라고 NYT는 전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최근 교통 안전을 명분으로 멕시코 트럭의 미국 배송을 허용하는 계획을 철회했다. 2000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맺으며 미국·캐나다·멕시코가 서로 트럭 운송 시장을 개방한다는 약속을 어긴 것이다. 멕시코는 보복으로 미국산 연필·화장지 등 90개 품목의 수입 관세를 크게 올렸다.

스티븐 추 미 에너지장관은 지난주 “중국이 온실가스 감축 협정에 서명하지 않는다면 중국 상품에 대한 관세 부과를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셰전화(解振華)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 부주임은 “이산화탄소 배출 규제를 보호무역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강력 반대한다”고 비난했다.

미국은 이미 중국산 가금류 수입 금지를 연장하고, 경기부양법안에 미국산 철강 구매 조항을 삽입했다. 그러자 중국 상무부도 코카콜라가 중국 최대 주스 생산업체 후이위안(匯源)을 인수하려는 것을 가로막았다. 자국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억제하려는 정책도 잇따르고 있다. 중국·인도는 수출업체에 대한 부가세 환급을 늘려 수출을 독려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버터·치즈·분유에 대해 수출 보조금을 지급했다. 러시아는 수입 중고차의 관세를 높였고, 인도는 중국산 장난감 수입을 금지시켰다. 아르헨티나는 자동차부품·섬유·가죽제품 수입에 새로운 면허제를 도입해 수입을 어렵게 했다.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경쟁에 불안감을 느끼는 국민들이 지도자들에게 보호주의 장벽을 높이라고 요구하고 있는 만큼 2009년은 매우 위험한 해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게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는 “미국은 자유무역에서 멀어지는 위험에 처해 있다”며 “올해와 내년이 자유무역의 성패를 결정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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