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세계/바텐더] 칵테일 제조자, 대화 상대, 때론 고민상담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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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선하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배병준(34)씨는 2주에 한 번 머리를 깎는다. 여느 남자와 달리 한 달에 한 번쯤 손톱 손질도 받으러 간다. 매일 신문을 꼼꼼히 챙겨 보는 것은 물론 외국어 공부에도 신경 쓴다. 필드에 나갈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데 1년간 열심히 골프를 배우기도 했다. 개각이 있으면 바뀐 장관급 인사의 사진을 가져다 놓고 얼굴을 익힌다. 그의 직업은 서울 프라자호텔의 바텐더다. 이 모두가 11년째 바를 지키면서 생긴 습관이다. 사회 초년생부터 고위 공직자, 대기업 임원까지 다양한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기억해야 할 것도 많고, 배워야 할 것도 많았다. 깔끔한 매무새와 예절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끝없는 공부=바텐더는 호텔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바에서 손님에게 칵테일을 비롯한 주류·음료를 서비스하는 직업이다. 하지만 식당에서 맥주·소주를 팔 때와는 해야 할 일과 요구되는 자질 모두 전혀 다르다. 바에 앉은 손님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기보다 바텐더와 세상 사는 얘기를 나누고 싶어할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혼자 온 손님일 경우엔 더 그렇다. 손님이 말을 걸었는데 바텐더가 그 주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면 대화는 거기서 끊긴다. 바텐더가 시사·스포츠는 물론 각종 전문 분야에 대해서도 기초적인 내용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이유다.

자신의 전문 분야인 주류에 대한 지식은 말할 것도 없다. 취업·인사 포털 인크루트가 현직 바텐더 23명에게 물었더니 바텐더로 성공하려면 ‘지속적인 공부와 연구가 중요하다’(47.8%)고 꼽은 응답자가 가장 많았다. 경력 15년의 안성진(39)씨는 “몇 년 일하다 그만둘 생각이 아니라면 20대 초반에는 현장 경험을 쌓기보다 공부에 투자하는 편이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권했다. 설문에 답한 한 바텐더는 “화려한 모습 뒤에 숨겨진 바텐더의 못 박인 손을 한번 살펴보라”며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술잔에 인생을 담아=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게 하나 더 있다. 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정성을 쏟는 일이다. 경력 17년째인 전재구(36)씨는 지금도 10여 년 전 자신이 운영하던 대구의 바를 찾은 한 손님을 잊지 못한다. 장맛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새벽 1시쯤 가게에 들어온 그 손님은 “이곳 칵테일과 분위기를 잊지 못해 경기도에서 대구까지 운전해 왔다”고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 내 칵테일을 떠올려 줬다는 게 너무 고마웠다”고 말했다. 평소 손님에게 정성을 들이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텐더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직업이다. 낮과 밤을 바꿔살아야 하고 술취한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간혹 사고가 생길 수도 있다. 배병준씨는 “점점 줄긴 하지만 만취 손님이 행패를 부릴 때도 있다”며 “평소 알고 지내는 바텐더 한 사람은 취객을 말리다 맞아 눈에 멍이 들어 며칠간 일을 쉬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런 것도 다 인생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웃어넘겨야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다는 얘기다. 전재구씨는 “바텐더 지망생에게 좀 더 큰 꿈을 꾸라고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바를 경영하는 것이 궁극적 꿈이 돼선 안 된다”며 “이는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어떤 바텐더가 되겠다는 분명한 철학을 갖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뜻이다.

바텐더가 되려면=학원에 다니거나 2년제 또는 4년제 대학의 호텔경영 등 관련 학과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특별한 교육 없이 칵테일바나 레스토랑에서 바텐더 보조일을 하며 경험을 쌓는 경우도 있다. 진로는 호텔·클럽·레스토랑·여객선과 개인이 운영하는 칵테일바 등이 있다. 간혹 해외 취업을 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직업인 만큼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기는 성격은 필수다. 밝고 외향적 성격이면 금상첨화다. 오랫동안 서서 일하기 때문에 체력도 뒷받침돼야 한다. 무엇보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바텐더는 바의 다른 직원에 비해 할 일이 많은 편이다. 술잔을 닦고, 바를 치우는 일이 끝없이 이어진다. 손님이 바로 앞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청결 유지가 아주 중요하다.

인크루트 이광석 대표는 “외식문화가 다양해지고 음주문화도 바뀌고 있어 바텐더 일자리는 당분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도 술을 ‘마시는’ 문화에서 ‘즐기는’ 쪽으로 차츰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2007년 기준으로 바텐더의 평균 연봉은 1914만원이다.

관련 자격증으로는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시행하는 조주기능사가 있다. 필기와 실기시험으로 구성돼 있는데 7분 동안 세 가지 칵테일을 만들어야 하는 실기의 난이도가 높은 편이다. 최종 합격률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자격증이 필수는 아니지만 근무조건이 상대적으로 좋은 호텔에 진출할 때는 자격증을 요구하기도 한다. 호텔 근무를 희망한다면 영어·일어·중국어 등 외국어를 익혀 두면 도움이 된다.

외국의 바에선 흰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바텐더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앞으로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나이 든 바텐더가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많다. 사람이 그리운 노인들이 술 한잔 시켜놓고 모르는 사람과도 쉽게 대화할 수 있는 바를 찾는 일이 많아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손님의 연령층이 올라가면 이들을 상대하는 바텐더도 그만큼 더 오래 일할 수 있게 된다.

자료 협조: 인크루트 www.incruit.com



선배 한마디 24년차 이석현씨

유명 야구감독 왔을 때
옛날 얘기하니 좋아해

롯데호텔월드 이석현(47·사진) 수석 바텐더는 “칵테일을 마시는 것은 인생을 음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술과 달리 독하고 씁쓸하게 만들 수도 있고, 순하고 달콤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을 수 있다는 얘기다. 좋은 바텐더가 되려면 풍부한 인생 경험을 갖춰야 하는 이유다.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

“바텐더는 기본적으로 서비스직이다. 손님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일반 서비스직과 다른 점도 있다. 술을 마신 사람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먼저 읽고 응대하지 않으면 힘들어 못한다.”

장단점은.

“다양한 손님을 접할 수 있고, 이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밤낮을 뒤바꿔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가족에게 미안한 경우가 많다. 이따금 취객 때문에 경찰서까지 가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기억에 남는 손님은.

“유명 야구 감독 한 사람이 찾아온 적이 있다. 미리 기억해 둔 그 사람의 선수 시절 경기 장면을 얘기했더니 무척 좋아하더라. 바텐더는 어떤 손님이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많은 분야를 공부해야 한다. 외국의 경우 바텐더가 시사·문화·스포츠에 대한 상식을 갖추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일이다. 신문을 꼼꼼히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업무를 위해 신경 쓰는 것이 있다면.

“바텐더는 음료를 다루는 직업이기 때문에 혀끝이 예민해야 한다. 23년째 이 일을 하면서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도 절제하는 이유다. 이웃 나라인 일본의 경우 커피·와인·칵테일이 결합된 형태의 바가 많다. 앞으로 한국도 이런 형태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커피·차 공부를 하고 있다.”

자격증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실기 시험장에 가 보면 진열된 술병을 빨리 못 찾아 떨어지는 수험생이 종종 있다. 7분 안에 세 종류의 칵테일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술병 모양과 상표를 평소에 잘 기억해 시험장에서 빨리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직업 전망은.

“독신자가 늘고 고령화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따라 앞으로 바를 찾는 사람이 늘어날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에서도 65세에 정년 퇴직한 선배 바텐더가 단골 손님들의 요청으로 2년간 더 일한 적이 있다.”

지망생에게 한마디.

“돈보다는 인간 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바텐더가 돼야 한다. 매출에만 신경 쓰면 손님과의 관계가 오래 가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을 먼저 생각하면 돈도 자연히 따라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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