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훈범의 시시각각

박연차 리스트 vs 장자연 리스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6면

21세기인 오늘날까지 그 전통의 자취는 건재하다. 쇠 먹고 기름 칠한 리스트에 온 나라가 난리다. 새로울 것도 없는 게 하나도 아니고 둘이다. 지난 정권, 권력에 빌붙어 단물 빨던 기업가가 사방으로 돌린 뇌물을 넙죽넙죽 받아먹던 권력자들의 리스트가 하나요, 10년 무명의 설움 속에서 어떻게 한번 떠보려고 발버둥쳤던 여배우의 몸을 탐한 실력자들의 리스트가 또 하나다. 앞에는 안 되는 것 되게 하고 될 것은 더 크게 되게 해주는 대가로 제 주머니 채우고 나라 곳간 축낸 간신배들이 줄을 섰고, 뒤에는 죽음 말고는 탈출구를 찾을 수 없었던 약자의 가슴은 못 보고 젖가슴에만 침 흘리며 ‘원샷’을 외치던 인간 말짜들이 줄지어 앉았다.

세상의 관심은 그들이 누군지에만 있는 것 같다. 그 누군지 역시 새롭지 않다. 권력자 중에는 국회의원도 있고, 지자체장도 있으며, 검찰 간부도 있다고 한다. 실력자 중에는 일간지 대표도 있고, 방송국 PD도 있으며, 기업체 대표도 있다는 거다. 놀라울 거 하나 없는 구성인데 꼭 이름을 알아야겠다고 야단들이다. 누구는 권력자 명단을 먼저 공개해야 한다고 목청 돋우고 누구는 실력자 명단을 앞서 까야 한다고 핏대 올리는데 참으로 딱한 노릇들이다. 문제의 본질은 뒷전이고 서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리스트를 이용하려는 꿍꿍이만 남은 까닭이다. 여기서 한국 사회는 또 한번 때아닌 보수와 진보의 대결장이 된다.

솔직히 말해 리스트는 내 관심 밖이다. 여전히 기업가의 입과 여배우의 글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름들 아닌가. 섣불리 까본들 피해자만 늘어날 뿐이다. 서두를 일이 아닌 거다. 양과 염소는 구분해야 할 게 아니냔 말이다. 그건 검찰과 경찰의 몫이다. 수사 당국에 대한 불신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불신은 의혹의 어머니일 뿐 진실을 낳지는 않는다. 그럼 리스트를 덮어둬야 한다는 거냐고 묻는 건 바보들의 질문이다. 내 관심은 권력 의지란 결국 ‘트로피’를 얻고자 하는 인간의 근본 충동일까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출세한 자들의 보상심리가 당연한 것이냐는 얘기다. 내가 고생해 이 자리에 올랐으니 그 정도 떡값은 받을 자격이 있다, 내 말 한마디에 왕비가 될 수도, 무수리가 될 수도 있는 여배우의 성(性)도 한번쯤 상납 받을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생각을 과연 어디까지 참아줘야 하느냐는 것이다.

눈앞의 두 리스트를 정략적으로 활용하는 건 ‘힘센 남자’들의 트로피 콤플렉스를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상대편을 망신시키면 그만이고 내 편의 치부엔 관심 없는 까닭이다. 꼭 그만큼의 확률로 반대의 경우가 가능할 터다. 결국 사회는 또 한번 ‘그놈의 정’의 포로가 되고 옷 벗어두고 가방 잃고도 서울에 왔으니 됐다고 자위하고 마는 것이다.

네 편 내 편 음험한 눈길 거두고, 있는 그대로만 똑바로 보자. 그것이 검찰과 경찰이 한눈 못 팔게 만들고, 힘만 센 미성숙아들이 높은 자리 차지하는 걸 원천 봉쇄하는 토양을 만든다. “집안이 가난해지면 현모양처가 생각나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훌륭한 재상이 아쉬워진다”던 전국시대의 정치가 이극의 말이 새삼 떠오르는 요즘이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