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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고 지도자 해부] 13억 중국인의 '사상 디자이너' 리창춘(李長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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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창춘(李長春)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다음달 4~7일 한국을 찾는다.
그는 중국 권력서열 5위다. 당의 선전, 언론, 이데올로기, 민족문제, 통일전선을 담당한다. 13억 중국인의 사상, 즉 머리 속을 디자인하는 권력자다. 장쩌민, 후진타오 두 군주 밑에서 이 업무를 수행했다.
중국 넘버5의 방한에 맞춰 그의 모든 것을 살펴봤다.

◇하얼빈 대학 출신의 최연소 테크노크라트 치국 그룹=리창춘은 중국공산당 제4세대의 ‘기술자(技師, 테크노크라트) 치국 그룹’ 중에 가장 젊다.
1944년2월 지린(吉林)성에서 태어났다. 원적은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다. 부친은 지린상수도 공장 노동자였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하얼빈 공업대학 재학 중 공산당에 입당했다.
리창춘이 걸어온 길은 후진타오 모델인 ‘홍전로(紅專路, 공산당에 충성하고 기술적으로도 우수한 길)’다. 중국 제4세대 테크노크라트로 국가를 다스리는 그룹의 일원이다.
80년대 중국 정계에는 하얼빈 대학 출신 두 명의 정치 스타, 왕자오궈(王兆國)와 리창춘이 혜성처럼 등장해 하얼빈 대학의 지명도를 높이 끌어올렸다. 둘은 대학 동창이지만 학부는 다르다.
대학 졸업 후 당분간 학교에 머물러 혁명을 수행했다. 이후 리창춘은 취직해 선양(瀋陽)시 스위치를 만드는 공장에 배치됐다. 이 공장은 주로 1만 볼트 스위치와 1만 볼트 배전설비를 생산했다. 전기학부 공업기업자동화 전공의 리창춘과는 맞지 않았다. 기초학과서 배운 것만 도움이 됐다. 그는 처음엔 전기용접공이었다. 후에는 제품 설계도 담당했다.
리창춘은 단순 작업에 만족하지 않았다. 여가가 나면 시 총공회(노동조합)가 주최하는 기술협력활동에 참가했다. 당시 시 지도자들이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선양(瀋陽)에서 기업파산, 리스, 주식제, 경매 등의 국영기업 개혁 단행=1975년 ‘문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덩샤오핑이 복권된다. 생산력을 높이고 경제 정돈을 추진했다. 리창춘은 생산을 이해하고, 기술도 갖췄고, 개혁도 진행할 인물이었다. 그는 선양시 전기공업공사 혁명위원회 부주임 겸 당위원회 상무위원에 발탁된다.
문혁이 끝나자 중국공산당은 정책의 중심을 정치투쟁에서 점차 경제건설로 옮겨갔다. 리창춘은 한층 더 주목을 받게 된다. 1981년 중공 선양시위원회 부비서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시당위원회 서기였던 리톄잉(李鐵映, 1936~ 중국공산당중앙정치국위원, 국무위원, 전인대부위원장을 역임. 중공원로 리웨이한(李維漢)의 아들. 동생 리톄린(李鐵林)은 중앙조직부상무부부장, 인사부부부장을 역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된다. 리톄잉은 중국공산당 원로이자 전 통일전선부장을 맡았던 리웨이한(李維漢)의 장남이다. 리톄잉의 어머니 진웨이잉(金維映)은 덩샤오핑의 전처다. 이 붉게 빛나는 각인은 리톄잉을 중공 제3세대 그룹 가운데서도 크게 빛나게 해줬다.
리톄잉이 국무원으로 전임 발령을 받는다. 전자공업부장에 취임한 리톄잉은 리창춘을 과감하게 선양시 시장에 발탁했다.
선양시는 중국의 대표적인 중공업도시다. 크고 작은 국영기업이 많다. 문혁으로 기업 효율은 저하돼 있었다. 1984년 선양시는 국가로부터 종합개혁 시범도시로 인가를 받는다. 리창춘이 정책을 실시할 권한을 부여받은 것이다. 선양시는 선도적으로 기업파산, 리스, 주식제, 경매 등 많은 개혁 시범을 단행한다. 하나하나가 모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이들 조치가 리창춘을 개혁자로서의 지위를 굳히는 계기가 됐다.
1985년 리창춘은 랴오닝성 부서기 겸 선양시 서기로 승진했다. 게다가 중국공산당 12기 중앙 후보위원에 선출됐다.
1986년 리창춘은 랴오닝성 성장대리로 승진했다. 다음해에는 성장에 선출됐다. 당시 42살이었던 그는 중국에서 가장 젊은 성장이 됐다.

◇허난(河南)성 치세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를 받다=1990년 리창춘은 농업으로 유명한 허난성 성장대리로 전임 발령을 받았다. 다음해에는 성장으로 선출됐다. 1993년에는 허난성 당서기로 임명됐다.
리창춘은 허난성에서 7년간 활약했다. 허난성의 편리한 교통, 풍부한 문화관광 자원 등의 장점을 이용해 농업이 주던 허난성 경제구조를 점차 공업으로 전환시켰다. 상당한 성과도 거뒀다.
허난성에서 리창춘의 정치적 성과에 대한 평가는 찬반 양 극단으로 나뉜다.
칭찬하는 사람들은 그를 ‘인민의 우수한 성장’이라고 칭찬한다. 이유는 이렇다. 리창춘이 허난성에 전임해 온 다음해 허난성은 대수해를 입었다. 직접적인 경제손실이 50억 위안에 달했다. 이재민만 2300여 만 명에 달했다. 재난을 당한 기간 동안 리창춘의 사무실은 따로 없었다. 그는 항상 주요 피해지역을 전전했다. 피재민들의 주택·식량·의료문제를 현장에서 바로바로 지휘해 해결했다. 게다가 군인 유가족, 오보호(五保戶, 오보호가 되는 대상은 부양의무자가 없는 자, 노동능력이 없는 자, 생활비가 나올 곳이 없는 자로 보호 내용은 음식, 의복, 의료, 장의 등이다. 고아에게는 교육도 제공한다) 등을 중점적으로 배려했다.
하루는 리창춘이 허난성 구스(固始)현 리지(黎集)향 난위안(南園)촌에서 수해 구조를 하고 있을 때 홍수로 제방이 무너졌다. 리창춘은 자신의 위험은 개의치 않고 피재민을 자기보다 먼저 피난시켰다. 게다가 재해가 지나간 후 연설에서 그는 “수해로 아이들이 학업을 게을리하면 안된다. 파괴된 학교 건물은 밤낮을 가리지 말고 공사를 서둘러 한 달 내에 재건해야 한다. 여름 방학이 끝난 후에 아이들이 학교에 등교할 수 있게 하겠다. 수해 때문에 문맹자가 늘어나면 안된다”라고 역설했다. 교육중시를 명확히 한 것이다.
리창춘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허난성 통치 시기가 허난성의 에이즈 만연 시기와 일치한다고 지적한다. 리창춘이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오늘날 허난성에 에이즈 만연을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또 리창춘이 허난성 공업화 전환을 추진하면서 허난성에서 만든 가짜 물건, 위조품이 크게 늘어나 전국에 해독을 끼쳤다고 비난한다. 리창춘은 강력한 위조품 단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민간 여론은 리창춘의 창창한 승진의 길을 방해하지 못했다.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이데올로기 공작을 좌지우지=1997년 중국공산당 15기 1중전회에서 리창춘은 허난성 서기로서 중앙정치국 위원에 선출된다.
1998년 장쩌민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중앙은 리창춘을 중국 GDP 1위의 대성인 광둥성 서기로 전임 발령했다. 리창춘은 광둥성의 고도 성장 유지에 성공했다. 동시에 ‘제국’의 변방 광둥성을 당 중앙과 주파수를 맞추는데도 큰 성과를 거뒀다.
2002년10월 중국공산당 16기 중앙회 중전회 제1회 전체회의에서 리창춘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른다. 중국공산당의 선전과 통일전선을 주관하게 됐다. 이뿐만 아니다. 2007년10월 제17기 중앙회 중전회 제1기 전체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유임됐다. 장쩌민과 후진타오 두 보스를 위해 여론을 관할하게 된 것이다.
2008년 올림픽 개최 전후에 중국공산당은 ‘여론 통일’ 조치를 취한다. 90% 이상의 뉴스 소스를 신화사에서 받도록 했다. TV도 주간방송국인 CC-TV가 취재해 방영한 것만 재방영하게 했다. 전국 31개 성·시·자치구의 종이 매체와 TV방송국은 모두 ‘파오룽타오(跑龍套, 연극에서 깃발을 든 의장병으로 용 무늬가 있는 의상을 입고 대장 옆에 붙어 뛰어 돌아다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말단 단역의 뜻)’로 전략했다.
리창춘은 전제적 집권제 하에서 성장한 충신이다. 그가 선양에서 국영기업 파산을 추진할 당시에는 개혁에 올인하는 기세였지만, 이제는 중남해의 큰 파도에 직면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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