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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105> 캉성(康生)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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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6월 6일 베이징대학 학생기숙사를 방문해 학생들을 선동하는 캉성. 김명호 제공

1980년 가을, 문화혁명 시절 4인방과 그 추종자들이 절취해 간 문물들이 외부에 공개됐다. 5년 전 세상을 떠난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전국문혁소조 고문이었던 캉성(康生)의 것들이 양과 질에서 단연 1위였다. 천보다(陳伯達), 장칭(江靑), 야오원위안(姚文元)이 그 뒤를 이었지만 다 합쳐도 캉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문화와 거리가 멀었던 왕훙원(王洪文)과 문물에 관심이 없었던 장춘차오(張春橋)는 단 한 점도 없었다.

캉성의 집에서 압수해 온 고서 1만2000여 책과 문물 1200여 점을 본 한 외국인이 “중국에 대부호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다. 이 중에 몇 점만 소유해도 백만장자다. 캉성은 억만장자였다”고 탄성을 질렀다. 1000여 년 전의 벼루와 한(漢)대의 인장, 명품 서화들이 큰 방 몇 개를 꽉 채우고도 모자랐다. 30만 년 된 화석과 2000년 전의 청동기도 있었다. 고서 중에는 송·원 시대의 판본과 판화가 곁들여진 명(明)대의 음란서적이 많았다. 홍위병들을 부추겨 수장가들의 집에서 탈취했거나 박물관에서 잠시 보고 돌려준다며 빌려온 후 떼어먹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캉성은 1920년대에는 상하이에서 지하공작자로 활동했다. 30년대에는 중공의 코민테른 대표단 부단장이었고 옌안(延安) 시절에는 중앙당교 교장으로 공산당 이론을 직접 강의했다. 논리가 명쾌하고 어휘가 중복되는 경우가 없었다. 감정도 풍부해 사람들을 긴장시켰다. 듣고 나면 등이 축축하고 한기를 느꼈다.

40년대에는 사회부와 조사부를 관장하며 모든 정보를 장악했다. 기상천외한 사건을 많이 만들어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았다. 별명이 ‘회자수(망나니)’였다. 50년대에는 교육혁명과 대약진운동을 부추겨 전 중국을 피곤하게 했다. 펑더화이(彭德懷)도 그의 계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문화혁명도 캉성의 치밀한 각본대로 진행됐다.

그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단결·통일·합작·우호는 수정주의를 상징했고, 대립·분열·투쟁이 혁명을 의미했다. 덩샤오핑은 반도로 몰렸고 시진핑(習近平)의 부친은 죽음의 문턱까지 간 적이 있었다. 마오쩌둥의 의중을 읽을 줄 알았고 상하이 시절부터 알고 지낸 장칭과의 인연도 절묘하게 활용했다.

캉성은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고전문학과 예술에 관해서는 그야말로 무소불통이었다. 희곡과 소설에 조예가 깊었고 서법과 회화는 당대의 일류 서화가들을 능가했다. 초서는 일품이었고 양손을 자유자재로 활용했다. 전각도 대가 소리를 듣기에 손색이 없었다. 대(大)화가이며 전각가인 치바이스(齊白石)의 작품들을 촌스럽다며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네가 제(齊)라면 나는 노(魯)다. 너는 희지만(白) 나는 붉다(赤). 물(水)은 돌(石)을 뚫는다”며 노적수(魯赤水)라고 각한 인장을 자신의 작품에 찍곤 했다. 그의 문화 수준은 깊이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지만 밖으로 드러낸 적이 없고, 남들이 알아주기도 바라지 않았다. 문을 닫아 걸고 혼자서만 즐겼다. 재능이 알려지면 세상살이만 복잡해진다고 생각했다.

그는 음험함과 지혜로움을 동시에 갖춘 모략가이며 기재(奇才)였다. 자신이 추종하던 사람들의 몰락을 정확히 예견했고 그의 선택은 항상 적중했다. 리리싼(李立三)의 노선을 추종했지만 왕밍(王明)으로 말을 바꿔 탔고 결국은 마오쩌둥을 지지했다.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왕밍에게 치명타를 던져 마오의 지위를 확고하게 해 주었다. 말년에는 ‘장칭과 장춘차오도 반당분자’라고 마오에게 일러 바쳤다.

모든 음모가와 야심가들의 말로가 좋지 않았지만 캉성은 77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문혁이 끝나기 1년 전에 국가부주석 직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도 국장이었다. 사후에 당적이 박탈되고 바바오산(八寶山) 열사릉원에서도 쫓겨났지만 중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모략가였다. 이 분야에 관한 한 수천 년의 중국 역사상 비견될 인물을 찾기 힘들 정도다. 역사는 재평가를 좋아하지만 캉성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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