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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기행]19.'태백산맥' 인제 필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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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형제간에도 총부리를 댔던 좌.우익의 갈등, 피의 보복. 아직도 우리에게 그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이념과 사상의 갈등은 어느덧 우리민족의 원죄가 되어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임권택 감독이 동족상잔의 처절함을 담아낸 '태백산맥' (94년9월개봉.태흥영화사 제작) .이념이 한 마을을 좌.우로 편가르기한 쓰라림을 그린 영화다.

강원도인제군인제읍귀둔1리 필례. 영화 태백산맥의 주 촬영지중의 하나다.

소설속 주무대는 지리산이지만 영화는 경기도 벽제의 세트 (80채) 를 비롯 필례.한계령.보성.장성등을 배경으로 찍었다.

필례에서 찻집겸 나그네의 머뭄터 역할을 하는 설락원. 빨치산대장 염상진 (김명곤분) 은 이곳 판자집에서 국방군을 피해 빨치산들과 은신하면서 재기를 도모했다.

지금 이 판자집은 울긋불긋한 물감과 붓으로 가득찬 화가들의 작업실이다.

설락원앞의 한계령은 단풍의 빨강, 은행의 노랑등 자연의 물감들이기가 숨가쁘게 마무리되고 있다.

석양의 바위는 햇빛을 받아 보라색 기암으로 변신한다.

개들은 가을의 쓸쓸함을 메우려는듯 외지인을 보면 컹컹 짖어대고 - . 필례약수터앞 필례식당의 음식 메뉴판의 글귀는 독특하다.

“필례에선 반드시 예의를 지켜주세요” 라고. 이 문구는 사람들이 몰리는 관광지로 변신한 요즘의 세태를 반영한 것이다.

사실 필례 (必曳) 는 예전부터 피난처를 구하던 사람들이 찾아온 곳이었다.

이런 까닭에 '사람을 끄는 장소' 라는 의미로 필례란 지명이 생겼다는 게 이곳 주민들의 설명이다.

필례가 사람들의 입줄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30년 구리성분이 있는 희귀한 약수가 발견되면서부터. 필례약수로 밥을 하면 구리의 붉은 빛이 감돌고 약수를 떠 병에 담아 놓으면 어느새 병주변이 빨갛게 변한다.

피는 누구나 빨간 것처럼 필례약수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좌익 염상진, 우익 염상구 (김갑수 분) , 중간에 낀 민족주의자 김범우 (안성기 분) 도 이 약수앞엔 평등하다고나 할까. 빨치산들이 국방군에 쫓겨 패주를 거듭했던 한계령. 한계령은 요즘 도시의 갑갑함을 피해 나온 관광객들로 붐빈다.

지금 필례에서 태백산맥에 등장한 빨치산과 국방군을 찾지말라. 오히려 도시의 콘크리트 냄새를 지우려는 도시의 도망자들을 찾아보라. 경기도 파주에서 필례를 찾은 이송인씨 (47) 는 사업을 청산하고 이곳에 뿌리를 내릴 참이다.

“왜라는 질문에는 한마디로 대답하기가 곤란합니다.

필례에 오면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요.”

송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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