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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불투명한 후계자 계승, 정통성 콤플렉스를 낳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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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호 32면

선조는 학문을 좋아하고 예술에도 능한 임금이었다. 『열성어필(列聖御筆)』에 실린 선조의 그림과 글씨. 제목은 난죽도(蘭竹圖). 동아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가 권태균

선조가 태어날 때만 해도 그가 임금이 되리라고 여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종의 7남인 덕흥군(德興君) 이초(李초)의 셋째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가 태어나기 1년 전(1551) 명종은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에게서 적자(嫡子) 이부(이 부)를 낳았다. 이부는 명종 12년(1557)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가 있는데 중종의 수많은 서손(庶孫) 중 한 명인 하성군(河成君) 이균(李鈞:선조)에게 왕위가 돌아올 가능성은 없었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① 방계 승통

그러나 순회세자(順懷世子)가 명종 18년(1563)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죽으면서 하성군에게도 일말의 희망이 생겼다. 김시양(金時讓)은 『부계기문(부溪記聞)』에서 순회세자가 죽자 애통해하던 명종이 “내가 어찌 통곡하겠는가? 을사년에 충현(忠賢)들이 죄도 없이 떼죽음을 당하는데 내가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중지시키지 못했으니 내 집안에서 어찌 대대로 군왕이 나올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김시양은 “크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먼 훗날까지 신하를 울릴 만하다”고 칭찬했다. 명종이 실제 이런 말을 했을 수도 있지만 명종은 자신의 핏줄에게 왕위를 넘기려는 계획을 한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부계기문』이나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등은 명종이 하성군을 후사(後嗣)로 점지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명종이 왕손들에게 “너희들의 머리 크기를 알려 한다”면서 익선관(翼善冠)을 써 보라고 명했는데, 나이가 가장 어렸던 하성군이 관을 받들어 돌려드리면서 꿇어앉아 “이것이 어찌 상인(常人)이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라고 하자 기특하게 여긴 명종이 왕위를 전할 뜻을 가졌다는 것이 『부계기문』의 내용이다. 이 내용은 『광해군일기』에 실려 있는 소경대왕(昭敬大王:선조)의 행장(行狀)에도 나온다. 하성군이 익선관 쓰기를 사양하자 명종이 경탄하면서 “그렇다. 마땅히 이 관을 너에게 주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명종은 하성군을 후사로 지명한 적이 없다. 『선조실록』 총서(總序)는 명종이 재위 20년(1565) 와병 중일 때 하성군을 후사로 결정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명종이 아프자 대신들이 조카 중에서 후사를 미리 선정하자고 청했고 “임금이 드디어 하성군에게 의약(醫藥) 시중을 들라고 시키고 따로 명을 내려 선비를 사부(師傅)로 삼아 가르쳐 이끌도록 했다”는 것이다. 의약 시중을 시키고 사부를 두어 공부시킨 것이 하성군을 후사로 삼으려는 의사였다는 뜻이다.

반면 『명종실록』의 기사는 다르다. 명종이 하성군에게 사부를 붙여 공부를 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재위 20년이 아니라 21년이었으며 그 이유도 달랐다. 성종의 손자 경양군(景陽君) 이수환(李壽環) 부자가 재산 문제로 서처남(庶妻男)을 때려죽인 사건이 발생하고, 청릉수(淸陵守) 이수하(李壽賀)가 창기를 끼고 놀다가 충의위(忠義衛) 이균(李鈞)를 찔러 죽인 사건이 발생하자 명종은 “종친이 대개 무식해 심지어 중죄까지 범하니 내가 심히 통탄한다”며 사부를 뽑아 왕손을 교육시키라고 명한 것이다. 이때 사부의 교육 대상은 하성군뿐만 아니라 풍산도정(豊山都正) 이종린(李宗麟), 하원군(河原君) 이정(李정), 전(前) 하릉군(河陵君) 이인(李인)까지 모두 네 명이었다. 끝내 자식을 낳지 못하면 넷 중에서 후사를 선택하려는 의도였다. 나이가 제일 어렸던 하성군이 가장 불리했지만 그에게는 인순왕후의 총애라는 막강한 무기가 있었다.

율곡 이이(李珥)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명종 20년의 와병 때 있었던 중요한 사건을 전해 주고 있다. 이이는 “그해 9월 임금이 편찮으신데 순회세자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국본(國本:세자)이 정해지지 않아 인심이 위태롭고 두렵게 여겼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등이 국본을 정하자고 청했으나 임금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명종은 후사를 세우자는 대신들의 청을 거부했다. 『부계기문』은 명종의 와병 때 인순왕후와 이준경이 하성군을 명종의 후사로 결정하고 하성군의 잠저(潛邸)를 호위시켰다면서 “명종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전해 준다. 이이도 『석담일기』에서 “임금의 병이 위중해지자 중전(中殿:인순왕후)이 대신들의 처소에 하성군의 이름을 쓴 봉서(封書) 한 통을 내리고 대신들만 보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이는 “대개 중전이 임금의 뜻(上意)을 받들어 임금이 돌아가신 후 하성군을 세우려는 것이었다”고 쓰고 있지만 명종은 그런 뜻을 표시한 적이 없었다. 병에서 회복된 명종은 자신도 모르게 하성군이 후사로 거론된 사실에 불쾌감을 느꼈다. 명종은 대신들에게 “내가 지금 황천과 조종의 말 없는 도우심에 힘입어 위기에서 소생했으니 국본의 탄생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이제 다시 다른 의논이 있어서는 안 된다”(『부계기문』 재위 20년 10월 10일)고 못 박았다. 하성군의 왕위는 물거품이 된 것이다.

명종은 후사를 낳지 못했고 재위 22년(1567) 6월 다시 병이 들었다. 6월 27일 갑자기 병세가 위중해졌는데 이 날짜 『부계기문』은 “임금은 신음을 그치지 않았고 말하고자 했으나 할 수 없었다. 환관 10여 명이 좌우에서 부르짖어 울 뿐이었다”고 적고 있다. 이미 유언을 남길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다시 인순왕후와 이준경의 핫라인이 가동되었다.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명종이 위독해지자 이준경 등이 중전에게 “일이 이미 어찌 할 도리가 없게 되었으니 마땅히 사직의 대계를 정해야 합니다. 임금께서 고명(顧命:유명)을 남기시기가 불가능하시니 마땅히 중전께서 지휘하셔야 합니다”고 말했다고 쓰고 있다.

『선조실록』은 “이준경이 울면서 중전에게 대계(大計)를 청하자 중전이 ‘을축년(명종 20년)에 정한 바대로 하려고 한다’고 전교했다”고 쓰고 있다. 하성군으로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부계기문』은 도승지 이양원(李陽元)이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장관을 불러서 고명을 함께 들어야 한다고 청하자 이준경이 “내가 수상으로서 유교(遺敎)를 받드는 것인데 왜 삼사의 장관을 부르려 하는가”라고 꾸짖자 이양원이 실색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하성군을 후사로 삼는다는 명종의 유교는 없었다. 이양원은 명종의 유언도 없이 하성군이 후사로 책봉되는 데 이의를 제기한 셈이었다. 『부계기문』은 선조가 즉위 후 이양원을 처벌하지 않은 것을 높게 평가하면서 “이양원이 만약 성명(聖明)의 세상을 만나지 못했다면 일족(一族)이 전멸되는 주륙(誅戮)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왕위 계승 절차를 투명하게 하려던 이양원의 행위가 잘못은 아니었다. 이렇게 하성군 이균은 명종의 유언도 없는 상태에서 인순왕후와 이준경의 공모에 의해 후사로 결정되었다. 명종이 사망하자 이준경 등은 도승지 이양원과 동부승지 박소립(朴素立), 주서(注書) 황대수(黃大受) 등을 덕흥군의 집으로 보내 후사를 모셔오게 했다.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승정원 주서 황대수가 이양원에게 “어느 군(君)을 모셔올 것인지 왜 대신에게 물어보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이양원이 “이미 정해진 일이니 물을 필요가 없소”라고 대답했다고 전해 준다. 황대수가 “비록 정해졌다 해도 반드시 대신의 말을 듣는 것이 옳소”라면서 대신에게 “덕흥군의 몇째 아드님을 맞아 와야 합니까”라고 묻자 대신은 “셋째 아들 하성군이시다”고 답했다. 대신은 물론 이준경이다. 이양원 등이 덕흥군의 저택에 갔을 때 위사(衛士)들이 아직 모이지 않아 잡인(雜人)들이 들락거리는 것도 막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때 16세의 하성군은 모친상 중이어서 울면서 사양하다가 궁중으로 들어왔다.

『선조실록』은 “이때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몰려들어 수레 뒤를 따랐는데, 이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 한 두루마리나 되었다”고 전한다. 임금의 수레를 호종했으므로 녹공(錄功:공신으로 기록됨)될 것을 바란 것이다. 그러나 이준경이 “예전에 결정된 일인데 신하가 무슨 공이 있단 말인가”라면서 태워 버리라고 재촉했다. 이렇게 선왕의 유명도 없이 중종의 서손(庶孫) 하성군은 인순왕후와 이준경의 공모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선왕의 유명(遺命)도 받지 못한 방계(傍系) 승통이었으니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