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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香의 길, 예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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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호 35면

고대 통상로는 실크로드만 있는 게 아니다. 인센스 로드(Incense road)도 있다. 향(香)의 길이다. 인도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이어지는 통상로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 2세기 사이에 가동됐다.

이는 성경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바친 금ㆍ유향ㆍ몰약 가운데 금을 제외한 두 가지가 향료이지 않은가. 태우는 향과 뿌리는 향수의 원료다. 귀한 약재이기도 했다. 유향은 보스웰리아라는 식물에서 나오는 수지다. 소화를 촉진하고 피부를 보호하며 염증을 삭여준다. 인도 전통의 술인 아유르베다에선 관절염에 쓴다. 태워서 연기를 내면 모기가 가까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말라리아 등 모기에서 비롯하는 질병에 약으로 쓰기도 했다. 몰약은 콤미포라라는 식물에서 생기는 수지다. 고대엔 방부제와 월경통ㆍ월경불순ㆍ치통ㆍ관절염에 사용됐다. 지금은 구강청정제로 쓰인다.

유향과 몰약 모두 아라비아반도 남쪽의 예멘이 주요 산지다. 진귀한 선물을 들고 솔로몬왕을 만나러 왔다는 시바의 여왕이 에티오피아가 아닌 이곳 출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예멘은 동으로는 인도, 서북쪽으로는 지중해 연안까지 향을 수출하고 중계무역까지 하면서 부를 누렸다. 예멘산 약재가 삼국시대 한반도까지 왔을지 모른다.

인센스 로드의 서북쪽 끝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의 가자지구다. 아시리아ㆍ메소포타미아ㆍ페르시아 등 고대 중동의 강국들이 대를 이어 가자지구에 쳐들어간 이유가 이 교역로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원정군을 보냈으나 보급이 어려운 데다 전염병이 돌아 점령에 실패했다. 로마인들은 이 나라를 ‘아라비아 펠릭스’(행복한 아라비아)라고 불렀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으로 기독교 지역인 유럽과의 교역이 끊기자 예멘의 향료 무역도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나중에 그 자리를 커피가 대신했다. 예멘 사람들은 커피 원산지라는 에티오피아에서 원두를 들여와 각국에 퍼뜨리고 스스로 재배도 했다.

이 나라 서남부의 알모카 항구는 예멘산과 에티오피아산 커피 원두가 모이는 교역장이었다. 모카 커피라는 용어는 이 항구에서 나왔다. 초콜릿 향과 신맛이 어우러진 모카 커피의 강렬한 느낌은 바로 알모카 항구에서 선적되는 예멘산과 에티오피아산 커피의 특징이라고 한다. 오스만 튀르크가 지배하던 시절, 홍해로 들어가는 모든 배는 이곳에서 통행료를 낸 뒤 출발했다. 독점으로 번영하던 이 항구는, 하지만 독점이 사라지면서 쇠락해 폐허가 됐다. 지금은 관광객만 이따금 찾을 뿐이다.

예멘의 또 다른 자랑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시밤이다. 16세기에 진흙 벽돌로 지은 5~16층짜리 건물 500여 채가 몰려 있어 ‘사막의 맨해튼’으로 불린다. 사막에 사는 베두인족의 기습으로부터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밀집형으로 도시를 설계했다고 한다. 그 장관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았던 우리 국민을 보호할 방법은 정녕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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