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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나는 빈방 … 한숨 쌓이는 신림동 고시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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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서울 대학동의 고시촌에는 전봇대마다 고시원·원룸에 입주할 사람을 찾는다는 전단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만 빈방을 찾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 [김형수 기자]

서울 관악구 대학동(옛 신림9동)에서 고시원을 운영하는 이창석(49·가명)씨는 2년 전 퇴직금에 대출금을 합쳐 5억원으로 고시원 건물을 인수했다. 방 31개의 4층 건물이다. 방 하나에 15만원씩 받아 관리비를 제하고 한 달에 300만원 정도 수입을 올렸다. 빈방이 없을 때 이야기다. 지금은 20개 방에만 학생이 묵고 있다. 전기·가스·수도요금에 화재보험료, 대출이자를 내면 생활비를 대기에도 빠듯해 원금 상환은 꿈도 못 꾼다. 이씨는 “학생들이 갈수록 주는데 그렇다고 방세를 올릴 수도 없는 처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10만원짜리 방도 나와=17일 오후 사법·행정·외무고시와 각종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몰려 사는 신림동 고시촌. ‘빈방 있음’이란 팻말이 곳곳에 눈에 띈다. ‘48회 곽○○ 합격을 축하합니다’라고 적은 미니 간판을 내세우며 명당임을 자랑하는 곳도, ‘신축 원룸’이라며 깨끗한 시설을 강조한 곳도 예외가 아니다.

고시원을 운영하는 고현태(64)씨는 “지난해 이맘때 40명 정도 입실했지만 올해는 26명뿐”이라며 “있던 학생들은 빠지고 새로 들어오려는 사람은 없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고시원의 이미자(53·여) 원장도 “한 사람이라도 더 받기 위해 방세를 10만원으로 내리고 공동 주방에서 취사하는 것까지 허용했다”고 말했다.

고시생이 빠지면서 인근 식당도 매출이 동반 하락했다. 세 집 건너 한 집은 유리창에 ‘임대’ 를 써붙여 놓고 영업 중이다. 찌개 전문점을 운영하는 김둘숙(43·여)씨는 “한마디로 (매출이) 반 토막”이라며 “매출은 줄고 원자재 값은 올랐는데 가격(한 끼 3500원)을 올릴 수도 없다”고 말했다.

신림동 고시촌은 1975년 서울대가 동숭동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오면서 형성됐다. 고시 준비생들이 몰려 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하숙집·자취방 이외에 고시원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특히 고시원은 책상을 놓고 잠만 잘 수 있는 쪽방 형태지만 독방을 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지방 출신이 많이 몰렸다. 신림동에서 4년째 사법시험을 준비 중인 김현성(26)씨는 “서울대 학생들의 입을 통해 고급 시험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전문학원가가 몰려 있고, 수준이 비슷한 학생과 그룹 스터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신림동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전성기는 외환위기 직후였다. 취직이 어려워진 반면 사법시험 정원이 1000명으로 늘면서 너도나도 고시에 매달려 고시생이 5만 명(고시원협회 추산)을 헤아렸다. 이때부터 원룸과 고시원이 여기저기 세워졌다. 관악소방서에 따르면 현재 등록된 곳만 668곳, 무허가까지 합치면 1500여 곳으로 추산된다. 지금은 2만5000여 명으로 줄었다.

2016년 사법시험 폐지를 앞두고 사시를 준비하는 학생이 줄기 때문이다. 로스쿨 입학을 대비하는 학생은 강남의 전문학원을,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은 노량진 학원가로 빠져나가고 있다. 신림동의 고시전문학원은 2007년 37개에서 현재는 11개에 불과하다. 김현성씨는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굳이 신림동에 머물 이유가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경기 침체가 겹치면서 고시 준비를 포기하는 학생도 늘고 있다.

◆녹두거리를 명소로=고시촌 인구가 줄면서 상권이 위축되자 관악구가 긴급 회생 작업에 나섰다. 방치했다가는 자칫 슬럼화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노량진에 있는 7, 9급 공무원 입시 전문학원을 유치해 수험생들의 발길을 신림동으로 되돌리도록 하겠다는 방안을 최근 내놓았다. 대형학원 건물을 신축할 경우 용적률을 250%에서 350%로 올려 주기로 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고시원과 원룸의 빈방을 다른 용도로 활용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숙박시설·독서실·주택 등으로 용도를 변경할 수 있도록 관계 부처에 법률을 개정하도록 건의할 예정이다.

관악구 김명철 생활경제과장은 “서울대생 가운데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는 700여 명에게 저렴한 비용에 고시원이나 원룸을 임대할 수 있도록 서울대 측과 접촉하고 있다”고 밝혔다.

고시촌 거리를 명소로 만드는 사업도 추진한다. 올해 안에 대학동의 녹두거리와 고시원길을 잇는 670m 구간에 32억원을 들여 전선 등을 도로 밑에 묻는 지중화 사업을 한다. 이 구간에 소광장 2개와 공원을 조성한다.

전국고시원협회 이승구 회장은 “중요한 것은 우수 학원을 유치하는 등 내용적인 측면에서 특화하는 것”이라며 “단순한 복지 혜택이나 생활 환경 개선으로는 고시생을 유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경진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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