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걸어 잠근 일본 … 빛바랜 그들만의 리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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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일본 최대 기전 기성전 도전기가 지난주 야마시타 게이고(山下敬吾) 9단의 우승으로 끝났다. 제한시간은 각 8시간. 소위 ‘이틀거리’ 바둑으로 전국의 명승지를 돌며 진행된 7번 승부에서 도전자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9단이 2대4로 패배했다. 그러나 세계 바둑은 이 승패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우승상금이 무려 4200만 엔(약 6억3000만원)이고 액수를 밝히지 않는 막대한 대국료가 별도로 주어진다는 사실, 그리고 일본 전통 복장으로 바둑판 앞에 꿇어앉은 사진 속 요다의 모습이 잠시 눈길을 끌었을 뿐이다. 기성전 우승상금은 4년마다 열리는 응씨배보다 크다. 전체 규모로 따지면 응씨배의 3배도 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바둑은 왜 여기에 무심할까. 실력의 부재가 주는 허망함 때문이다.

이번에 우승한 야마시타의 세계대회 전적은 23승32패(승률 42%). 지난 10년간 거둔 최고 성적은 ‘8강 2회’가 고작이다. 그러나 그는 일본 최대의 기성전을 4연패하며 돈방석에 올랐다. 세계 최고의 상금과 동양 3국 중 최하의 실력이 빚어내는 이 기막힌 부조화가 일본이란 나라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야구의 메이저리그든 축구의 프리미어리그든 실력과 돈은 손잡고 함께 다닌다. 일본 바둑만은 반대다.

일본은 언제부턴가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현대 바둑을 일으킨 일본은 과거 누구든 받아들였다. 중국인 우칭위안(吳淸源)과 린하이펑(林海峰), 한국인 조훈현과 조치훈이 그 뒤를 이었다. 한국 신문들이 대문짝만 한 1면 기사로 조치훈의 우승 사실을 전하던 그때의 일본 바둑은 단연 세계 최강이었다. 일본은 가부키·스모·바둑을 일본 3대 전통문화라 선전했고, 서양 세계를 향한 바둑 보급에도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한국과 중국이 순식간에 치고 나오면서 사태는 일변했다. 찬란했던 일본 바둑은 점차 우물 안 개구리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4년 전 한국의 아마 강자 3명이 일본기원의 문을 두드렸다. 프로 입단이 어려운 한국을 피해 입단도 쉽고 상금이 많은 일본에서 성공하자는 게 이들의 아이디어였다. 깜짝 놀란 일본기원은 긴급 이사회를 열어 온갖 규정을 바꾸는 무리수 끝에 이들의 참가를 원천 봉쇄했다.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이 일본에서 거부당하고 한국에 정착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 3대 기전이 비씨카드배처럼 오픈한다면 세계 바둑은 크게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일본에선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가 됐다. 한국·중국 기사들이 일본까지 들어와 우승을 휩쓸면 바둑의 인기가 더 떨어진다는 게 그들의 변명이다. 기득권을 사수하려는 500여 명의 프로기사 반발도 개방을 막고 있다.

일본 바둑은 그래도 굴러갈까. 아닐 것이다. ‘최고의 상금과 최하의 실력’이라는 비정상적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도 일본 바둑만의 저력이고 기적이지만 그게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일본 바둑이 쓰러지면 세계 바둑도 쓰러진다는 점이다. 세계 바둑의 위기가 전통과 영광으로 가득했던 일본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다.

야마시타 9단은 기성에 오른 뒤 “기쁘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쑥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터뷰하는 기자도 ‘세계 제패’ 같은 곤란한 질문은 아예 던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야마시타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세계 기전에서 이기지 못하면 진정한 실력자라 할 수 없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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