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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원 아낀 ‘최태원 위기 경영’ … 임직원은 ‘손자경법’으로 화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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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최태원(49·사진) SK그룹 회장은 지난해 ‘위기경영’으로 1조원을 벌었다. 생뚱맞은 말이 아니다. 최 회장은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터지자 SK경영경제연구소에 “국제 금융의 흐름이 심상치 않으니 정밀 분석을 해 보라”고 의뢰했다. 금융위기가 심각해질 것이라는 전망보고서가 나오자 최 회장은 각 계열사에 시나리오별 환 리스크 대책을 세울 것을 주문했다. 원유·가스 계열사들은 원화가치가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에는 결제기준일을 선적기준에서 하역기준으로 분산시켰다. 수송기간은 보통 한 달 정도 걸린다. 따라서 그동안 원화가치 상승으로 인한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원화가치가 떨어질 상황에서는 3개월로 돼 있던 외상거래(유전스)를 2개월로 줄였다. 한 달 동안 원화가치가 하락해 생기는 손실을 줄였다. 이런 식으로 지난해 그룹 전체가 방어한 환차손을 따지면 1조원이 넘는다. 경쟁사가 선적 기준일을 고집하다 1조원 이상의 환차손을 낸 것과 대조적이다.

요즘 최 회장의 위기경영 행보가 유별나다. 우선 그의 위기 의식은 왜 다른 그룹 총수들보다 더 클까.

“지금은 단순한 위기가 아니다. 생존조차 담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대마불사’라는 말은 이제 없고 ‘SK불사’도 장담할 수 없다.” 올 초 임직원과의 대화에서 한 말이다. 지난해 전체 매출 95조원, 영업이익 5조원 정도를 낸 그룹 회장의 말로 믿기 어려울 정도다. 외환위기 때 파생상품 때문에 SK증권이 위기를 겪었고, 외국계 투기자본인 소버린과 경영권 분쟁을 벌였고, 분식회계 사건으로 고초를 겪으면서 생긴 최 회장의 유전자(DNA)가 위기의식이라는 것이 재계의 설명이다.

6일 오후 3시쯤 서울 남대문로 그린빌딩 안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터졌다. 최 회장이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한 것. 이 빌딩에는 SK텔레콤 수도권 마케팅본부, SK브로드밴드, TU미디어, SK텔링크 등이 입주해 있다. 최 회장은 각 계열사 사무실을 돌며 직원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15층 SK텔레콤 마케팅사무실에서 최 회장은 걸음을 멈췄다. “여러분, 나부터 실천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최 회장은 “전 직원이 하나가 돼 스피드·유연성·실행력을 키워나가야 합니다”라고 말을 이었다.

마침 이곳에서는 직원들이 ‘생존확보’‘위기극복’이라는 글을 쓴 나무판을 격파하는 이벤트를 준비했다. 최 회장은 한 직원이 건넨 장갑을 끼고 단번에 나무판을 부쉈다. 16층 SK텔링크 사무실에서는 직원들과 바가지를 밟아 깨기도 했다. 이 바가지에는 ‘위기극복’이라는 네 글자가 있었다. 최 회장은 “ 구호 한번 외칩시다”라며 스피드·유연성·실행력 세 단어가 들어간 말을 선창했다.

◆생존 한계점(Death Point) 설정=최 회장은 ‘매출이 떨어지고 현금이 없어 정상경영이 어려운 한계점’을 데스포인트라고 했다. 그는 각 계열사별로 데스포인트를 만들라고 했다. 금융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을 상황까지 고려해 이런 지점을 파악하라는 주문이다. 경영계획을 두 달마다 새로 세우라는 지침도 내렸다.

이달 들어 최 회장의 행보가 더 빠르다. 계열사 곳곳을 돌며 직원들을 만나고 있다. 이른바 현장경영이다. 5일에는 서울 광장동 워커힐 호텔에 있는 김치연구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권오용 SK브랜드관리부문장은 “예전에도 현장을 중시했지만 올해는 특히 구석구석 많은 곳을 방문한다”고 전했다. 최 회장은 직원들에게 “글로벌 경제위기는 큰 기업이나 작은 기업이나 가리지 않고 쓰나미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누가 얼마나 생명을 연장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생존의 관건이 될 것”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그가 올 초 화두로 던진 ‘생존’을 역설한 것이다. 권 부문장은 “위기를 헤쳐나가는 주체는 실무자인 현장 직원이고, 회장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을 갖고 현장을 방문 중”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위기극복을 위한 실천과제로 스피드·유연성·실행력을 제시했다.

세 단어는 간간이 최 회장의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한데 묶여서 제시된 것은 지난해 10월 말. 경기도 용인 SK그룹 연수원에서 있었던 계열사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에서다. 국제금융위기가 본격화되던 당시 최 회장은 세미나 마감 발언에서 “우리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위기 상황이 올 것”이라며 CEO들을 긴장시켰다. “SK도 안전지대가 아니다”는 말도 했다. 당시 세미나에 참석한 한 인사는 “금융위기라는 쓰나미의 속도보다 우리가 더 빨라야 하고, 언제 어떤 상황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고, 반드시 해내고야 만다는 실행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고 전했다. 최 회장은 그때부터 이 단어들을 모든 임원회의, 신년사, 구성원과의 대화 등에서 앞세우고 있다.


◆손자병법 전략 채택=최 회장의 “생존하자”는 외침은 SK그룹 전체에 속도감 있게 퍼지고 있다. 이 회사 임직원들은 요즘 ‘손자병법’을 통해 생존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브랜드관리실이 스피드·유연성·실행력을 주제로 만든 ‘손자병법에서 본 생존의 지혜’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손무와 오나라 왕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영상에 나타난 소제목은 3개로 구성됐다.

첫째가 ‘풍림화산(風林火山:바람처럼 빠르게, 숲처럼 고요하게, 불길처럼 맹렬하게, 산처럼 묵직하게)’으로 스피드에 관한 것이다. 손무가 오나라 왕에게 “적벽대전에서 주유가 화공법을 기습적으로 써 조조의 100만 대군을 물리쳤다”고 설명한다. 동남풍이 부는 시간까지는 고요하게 있다가 한 번 움직일 땐 질풍처럼 나아간 게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응형무궁(應形無窮:쉼 없이 변하는 상황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이 지상전에서만 사용하던 학익진을 해전에 응용한 게 대표적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승가지이불가위(勝可知而不可爲:승리를 예견할 수 있지만 그냥 얻어지지는 않는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한 번 결정하면 망설이지 말고 실행해야 한다는 의미다.

최 회장은 “나부터 실천하겠다”는 약속대로 대기업 회장으로선 처음으로 연봉의 20%를 반납했다. 2006년 건강보험공단이 보험료 산출을 위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최 회장의 연봉은 약 22억원이다.

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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