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진 시시각각

잘못 부러진 차명진의 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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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아버지는 이북에서 내려온 무학(無學)자였지만, 차 의원은 1979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들어갔다. 캠퍼스 냄새를 맡자마자 청년 차명진은 경제철학회라는 이념 서클에 들어가 의식화 공부에 빠졌다. 그해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장기 집권이 끝났고 이듬해엔 5공 신군부의 한파가 서울의 봄을 덮쳤다. 차명진은 정보부에 끌려갔고 강제 징집되어 강원도 산골짜기 부대로 갔다. 제대하고 복학한 후 차명진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현장에서 활동하다 보니 김문수라는 ‘지도자의 이름’이 들렸다고 한다. 차는 김을 찾아가 “당신은 나의 지도자다. 당신을 따라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차는 김의 그림자가 되었고 위장취업 투쟁을 시작했다. 부천철탑공장, 주안공단의 전선제조업체, 구로공단의 대한광학 등에서 그는 노동자를 조직하고 파업을 지원했다.

김문수가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결성하자 차명진도 조직원이 되었다. 서노련은 86년 5월 3일 인천에서 시민·노동자의 대규모 시위를 주도했다. 시위대는 5공 독재 타도와 노동권 쟁취를 외쳤고, 집권 민정당 지구당사와 경찰차량이 불에 탔다. 김문수가 잡혀가자 심상정(전 민노당 의원)이 서노련을 이끌었으며 차명진은 중앙위원이 됐다. 차명진은 서노련의 해고자복직투쟁위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부인은 서울대 출신으로 위장취업 3년 선배였으며 지금은 사회복지사가 되어 노인요양시설에서 일한다.

서노련 활동이 쇠락하면서 김문수와 차명진은 노동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김과 차는 89년 좌파정당 민중당에 가세했다. 그러나 92년 총선에서 민중당은 처절한 좌절을 겪었다. 2004년 총선 때 좌파정당 민노당은 화려하게 국회에 진출했지만 92년만 해도 좌파가 부닥친 현실의 벽은 높기만 했던 것이다. 김과 차는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전면적으로 되돌아보았다. 동구권의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김과 차는 대안으로 사회민주주의를 공부했고, 다시 이념의 행로를 거쳐 자본주의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차 의원은 이렇게 회고한다. “노동자의 정치적 자유가 넓어지고 삶의 질이 나아질 수 있는 현실적 제도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서울대 안병직 교수의 조언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사람의 노동운동가는 ‘자본주의 정당’ 민자당(한나라당의 전신)에 입당했다. 그리고 지금 그 당에서 지사와 의원이 되어 있다. 차는 김의 지역구(부천 소사)를 물려받았다.

지난 1일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차 의원은 민주당 당직자의 공격을 받아 팔이 부러졌다. 이날의 폭행사건은 시대의 왜곡된 갈등을 상징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 보수정당 한나라당에 대한 강경 진보세력의 공세였다. 그렇다면 가장 상징적인 팔이 부러져야 했다. 대학 시절부터 자본주의를 열렬히 숭상하고 노동현장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온전히 우파적인 어떤 의원의 팔이 부러져야 했다. 왜 민주당 당직자들보다 더 노동을 고민하고, 더 자본주의를 회의하고, 입보다 몸으로 세상을 검증해 보려 애썼던 이의 팔이 부러졌는가. 잘못된 골절은 시대의 잘못된 이념 대결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진보·이념세력은 보수·실용세력에게 정권과 국회를 빼앗긴 것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니 당직자·보좌관이 의원에게 이념의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차 의원의 뼈야 다시 붙겠지만 한국 사회 이념의 골절은 언제나 아물 것인가.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