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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 시시각각

영화 속의 김현희를 보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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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히틀러는 전쟁에 패하자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다. 암살당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작전명 발키리’를 보러 영화관에 몰려들었다. 실제 사건이 모델인 ‘살인의 추억’과 ‘그놈 목소리’에서 범인이 끝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미리 안다. 그래도 극장이 미어졌다. 물론 실화를 소재로 삼았더라도 관객이 사건 자체에만 흥미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영화라는 장르에는 ‘사실(fact)’ 말고도 다양한 오락적 요소가 담겨 있으니까.

 그렇다면 올리버 스톤 감독의 ‘JFK’는 어떨까. 1963년 일어난 케네디 미 대통령 암살사건을 다룬 영화다. 케네디가 베트남 전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미국을 좌지우지하던 거대 군산(軍産)복합체의 비위를 거스르다 희생됐다는 암시가 강하게 담겨 있다. 만약 ‘JFK’가 오늘날까지 공식적인 암살범으로 남아 있는 하비 오즈월드의 단독 범행이었음을 역설하는 줄거리였다면 어땠을까.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기존의 것을 뒤집고 낯설게 하는 예술 특유의 비정규(非正規)적 속성, 불온함이 없기 때문이다.

케네디 암살사건 24년 후인 1987년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이 터졌다. 무려 115명의 귀중한 인명이 희생됐다. 그해 대통령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폭파범 김현희에게도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당시 나는 경찰서를 출입하는 사건기자였는데, 다른 언론사의 총각 기자 한 명은 김현희에게 반해 기자실에 그녀 사진을 걸어놓고 안기부(현 국정원)에 구애 편지를 보내는 촌극도 벌였다.

이 엄청난 사건에 대한 ‘음모론’은 90년대 중반 도쿄특파원 시절 친분 있던 조총련계 재일교포에게서 처음 전해 들었다. “그 사건 완전히 조작이라는군”이라며 몇 가지 ‘증거’를 나열하는 것이었다. 몇 년 뒤 일본인 노다 미네오(野田峯雄)의 『파괴공작』이라는 책이 출판됐다. 재일교포가 말한 ‘증거’에 살과 뼈를 덧붙이고 끼운 내용이었다. 사람을 혹하게 만드는 구석도 있었다. 기존의 상식을 뒤집는 음모론의 매력이다.

 솔솔 피어오르던 음모론은 2000년대 들어 시커먼 연기에 불꽃까지 내기 시작했다. 과감한 건지 무책임한 건지, 2003년에는 가톨릭 신부가 TV에 나와 “폭파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이듬해엔 여당의 원내대표(천정배)가 재조사 의지를 밝혔다. 국정원이 나서서 폭파사건을 재조사하더니, 지금은 국정원이 사건을 재조사한 배경을 ‘재재조사’하고 있다고 한다.

전후 사정을 종합하면 폭파 음모론은 정치적·이념적 이해관계에 홀린 이들과 호사가들의 흥미가 결합된 결과로 보인다. 그래도 음모론에 미련이 있다면 차라리 영화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쉰들러 리스트’처럼, ‘JFK’처럼 커다란 비극도 종내엔 문화로, 예술로 승화되어야 한 시대의 소화과정이 끝난다. 불행하게도 858기 폭파사건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22년이 지났는데도 김현희씨가 기자회견을 열고 “나는 가짜가 아니다”라고 항변할 정도 아닌가. 게다가 유족들의 아픔도 아직 아물지 않았다.

앞으로 22년이 더 지나면 ‘858기 사건’이나 ‘김현희’라는 제목의 영화가 상영될 수 있을까. 그 영화에 69세의 할머니 김현희씨가 카메오로나마 출연할 수 있을까. 적이 기다려진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