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영화,그들도 감동 받으면 눈물 흘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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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7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웨덴 작가 해리 마틴슨은 영화관을 "인생의 비겁자들을 위한 사원" 이라고 했다.

뉴욕 브룩클린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부터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했던 우디 앨런 감독도 "영화관에 가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괴로운 현실을 피할 수 있는 것" 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영화매니어들은 현실에 맞서지 않고 도피하는 비겁자들이라는 말이다.

영화가 환상의 예술이기는 하지만 개개인을 억압하는 현실의 문제들에 주목하면서 인간존재와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많기 때문에 해리 마틴슨이나 우디 앨런의 진술은 영화가 지닌 다양한 측면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나라 대선후보들의 경우만을 살펴본다면 이들의 진술은 일단 '정확' 하다고 하겠다.

대통령후보들은 분명 나라의 현실문제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에 맞설 대안들을 고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두컴컴한 영화관을 찾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어두컴컴한 폐쇄공간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또한 태양이 환히 밝은 양지를 지향하는 성향이기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선 아직 영화매니어가 대선후보로 나온 적은 없다.

중앙일보가 각 대선후보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5명 중에서 그래도 영화를 가장 많이 보는 사람은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다.

김대중 후보는 1년에 12~13편 정도, 그러니까 한달에 평균 한 편 정도의 영화를 관람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대선준비 때문에 바쁜 탓인지 지난 6월 남산감독협회 시사실에서 국민회의 당직자들과 함께 홍콩영화 '송가황조 (宋家皇朝)' 를 관람한 이후로는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후보는 주로 주변 측근들의 추천에 의해 관람할 영화를 선택하는데 지난해 개봉했던 '비욘드 랭군' 은 아태재단을 통해 직접 수입을 고려했을 정도로 큰 관심을 보였다.

한국영화로 가장 최근에 본 작품은 이창동감독의 '초록물고기' .한국영화도 자주 찾아보는 편이어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시사회에서 만난 인연으로 주연배우 오정해의 주례를 서기도 했다.

신한국당의 이회창 후보는 정치전선에 뛰어들기 전에는 가끔 영화를 보러가곤 했지만 요즘엔 통 못가고 있다.

마지막 관람한 영화가 지난해 상영했던 '굿바이 마이 프렌드' .에이즈에 걸린 친구에 대한 한 소년의 애틋한 우정에 부인과 함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한다.

자민련의 김종필 후보 역시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1년에 한두 편 관람하는 정도다.

최근에 본 영화는 지난 5월 개봉했던 '아버지'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은 가장이 가족의 무관심 속에서 혼자 투병하면서 가족에 대한 큰 사랑을 펼쳐가는 가족드라마였다.

민주당의 조순 후보 역시 영화는 1년에 2편 정도 본다.

하지만 최근에는 전혀 볼 시간이 나지 않아 기억에 남는 영화는 없다고. 이인제 후보는 화끈한 액션스릴러를 좋아해 부인과 함께 자주 영화를 보는 편인데 63빌딩에서 하는 아이맥스영화를 즐긴다.

가장 최근에 본 영화 역시 아이맥스 영화인 '고래의 노래' .현재 개봉중인 해리슨 포드 주연의 '에어포스 원' 이 재미있는 액션스릴러란 이야기를 듣고 조만간 보러갈 계획을 잡고 있다.

대선후보들이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감명깊었던 작품으로 꼽은 것은 대부분 할리우드의 고전적인 영화들이다.

이회창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똑같이 '미션' 을 감명깊은 영화로 꼽았으며 이와 함께 김대중 후보는 한국영화 중에서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 를 추가 했다.

이회창 후보는 "남미의 원시림을 배경으로 한 종교인의 헌신적인 사랑과 선교활동이 가슴찡했다" 고 소감을 밝혔다.

김종필 후보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를, 조순 후보는 '사운드 오브 뮤직' 을, 이인제 후보는 '벤허' 를 각각 감동의 명작으로 꼽았다.

현실의 문제에 관심이 큰 대선후보들인 만큼 위기상황에 처한 한국영화진흥책에 대해 물어보았다.

영화를 "제조업보다 수익이 높은 문화상품" 이라고 보는 이회창 후보는 "시나리오의 질을 높이고, 제작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지름길" 이라고 대답했고, 김대중 후보는 "완전등급심의제와 등급외전용관의 설치, 스크린쿼터제 준수, 영화진흥기금 확충" 등을 들었다.

김종필 후보 역시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는 완전등급심의제 도입과 스크린쿼터제 유지, 성인영화전용관의 단계적 허용" 등의 정책을 제시했으며 조순 후보는 "쿼터제 도입 등 눈앞의 정책보다는 영화의 질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일 수 있는 방안 강구" 가 중요하다고 했다.

이인제 후보 또한 한국영화의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이 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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