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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살 배기 아들 키우는 시각 장애인 엄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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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슈퍼우먼이 아니라 한명의 여자와 아내, 엄마로 치열하게 살고 있을 뿐이라고했다. 그녀의대답 속에서 시각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줄일 수 있다면 보람이다. 무엇보다 궁금했던게 있다. 누구에게나 사고는 예고없이 찾아온다. 그래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는 어디서, 어떻게생겨나는것일까. 취재_강승민 기자 사진_조병각 기자

스무 살, 총천연색이었던 삶이 암흑으로 바뀌었다. 수능 시험 전국 석차 상위 1% 안에 들면
서 명문대에 특차 합격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걸을 수 있는 찬란한 미래에 한 발 다가
갔다.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사고는 그때 발생했다. 입학을 앞두고 평소 불편하던 턱 관절
수술을 받았다. 수술 도중 3분여 동안 기도가 막히고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되면서 의식 불
명-전신 마비가 됐다. 19세 꿈 많던 예비 여대생은 대소변을 못 가리는 갓난아이와 같은 처
지가 됐다. 거의 모든 신체는 동작 불능이었지만 뇌는 살아있었다.


“‘당연히’회복될 거란 생각만 했다. 더 이상의 바람은 사치였다. 다시 일어나 학교에 가고싶었다.”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 죽지 않았으니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처음 손가락을 까닥거렸을 때 부모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손끝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손을 콩에대고 얼마나 문질렀는지, 손가락에는 물집이 잡혔다. 30m 거리의 병원 복도를 혼자서 걷는데 40분이 걸렸다. 생에 대한 의지는 땀으로 범벅됐다.

사고 발생 후 6개월. 몸의 대부분 기능이 깨어났지만, 시력을 잃었다는 청천벽력의 소식을들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통보였다.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면…. 부모는 딸을 등에 업고 백방으로 뛰었다. 병원에서 해답을 찾기 힘들어 무속인을 찾아가고, 중국에서는 신통방통하다는 눈침도 맞았다. 거기 답은 없었다. 시력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살아서 무엇하나? 어차피 이곳이 지옥인데.” 15층 아파트 옥상에 올라 세상을 떠날 결심을 했다.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세상을 떠나면 지옥에 가서 고통받을 생각이 떠올랐다. 괴롭고 분했다.

“ 김기현은 이미 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오늘 다시 태어나는 거다.”

그래도 살라는 영적인 암시였다. 사고 3년 뒤, 시각 장애인 등록을 하면서“이거 나중에라도 시력이 돌아오면 취소할 수 있는 거죠?”라며 울먹거렸다. 1급 시각 장애인의 현실은 그렇게 출발했다. 그즈음 학교에 복학했고, 1년을 울면서 학교를 다녔다.

“왜 다시 살게 한 걸까”“신은 과연 있는가”의 본질적인 고민을 거듭하며 기도했다. 어두운 현실에서 그래도 살려는 자에게 응답은 계속됐다.

“가족 중에 저와 같은 시각 장애인이 있는 사람, 믿는 가정에서 성장한 신앙이 좋은 사람, 요리를 잘하고 아기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 나와 함께 공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게 해주세요.” 2003년 한국맹인교회에 나간 첫날 그녀의 손을 잡고 집까지 안내해준 사람이 남편 박관용씨다. 시아버지는 장애인 학교 인천 혜광학교 교감 선생님이고 시어머니는 저시력의 시각장애인.

“ 내가 과연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라는 두려운 물음 속에서 남편을 만난 건 삶이 보낸 응원의 메시지였다. 체육학과 출신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손수 요리를 배운 남편의 외조에 힘입어 그녀는 보스턴대학 재활상담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지난해 아들 예승이가 태어나면서 또 하나의 힘들지만 소중한 길을 걷게 됐다. 엄마의 길이다. 그녀는 예승이가 어떤 모습인지, 모성의 눈으로 정확히 알고 있다며 행복했다.

그녀는 오는 4월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지난 1월 중순 만난 그녀는“장
애인이라고 해서 신파의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고, 또 슈퍼우먼으로 생각하지도 말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사람의 첫인상을 어떻게 파악하나요

목소리로 알게 됩니다. 말투와 언어 표현 등을 예민하게 듣는 거죠. 제가 시각 장애인이란 걸 알고 쭈뼛하고 당황하면 그 표정이 그려집니다. 예전에는 남편에게 상대방의 외모를 묻곤 했는데, 요즘은 외모를 따지는 게 편견이란 생각이 들어 잘 묻지 않습니다.

시력을 잃으면서 가장 발달된 감각은 무엇이죠

청각입니다. 목소리가 작거나 우물쭈물하는 사람은 대화가 힘들어요. 발음이 정확한 사람
이 편합니다. 시끄러운 곳에 가면 많이 피곤하고요. 연예인이 많이 나와 중구난방으로 말하
는 쇼 프로는 보기 힘들죠. ‘무릎팍 도사’는 둘이서 주고받으니까 재밌어요(웃음). 직감이란 게 늘었는데, 촉각은 특별히 발달하지 않은 것 같아요.

스무 살 이후 자신의 달라진 얼굴을 볼 수 없어 아쉽지는 않습니까

아쉽죠. 가족과 남편에게 물어보지만 소용이 없어요. 주근깨 늘었지? 기미 늘었지?라고 물
어도 만날 예쁘다고 하니까요(웃음). 가족은 내가 상처받을까 봐 예쁘다는 말을 하는 거겠
죠. 여자의 외모는 늘 궁금하죠. 미국에서 공부하고 3년 만에 돌아오니 한 친구가“너 피부
가 조금 늙었구나”란 말을 해서 한동안 심란했어요(웃음). 공부하느라 피부 관리를 전혀
못했거든요. 특정 부위의 몸이 불었거나 체력적으로 힘들면 나도 늙는구나란 생각에 속이
상합니다(웃음).

어떤 색깔을 좋아했나요

그런 말 물어보면 너무 기뻐요. 사람들은 제게 비주얼한 걸 물어보면 상처를 주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데,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다행히 저는 거의 모든 시력을 잃었지만 색깔은 구별할 수 있어요. 물론 남색과 검은색 등 미묘한 차이는 구별하기 힘들지만요. 저는 오렌지(주황색) 계통을 좋아해요. 그래서 제가 옷을 코디하고, 인테리어도 할 수 있지요. 색깔을 구별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축복이에요.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게 또 있어요. 제 취미가‘미니어처 모으기’란 걸 알고 나서죠. 저는 미니어처 모으는 일이 즐겁습니다.

그때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는 용서했나요

당시 의료 소송을 걸었지만 패소했어요. 부모님의 싸움은 그렇게 실패했죠. 기득권과의 싸움인 의료 소송은 환자들이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그들이 왜 인정을 안 하는지, 여전히 실망이고 의문입니다. 한국이 불행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 수술을 담당한 의사는 인간이라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담당 의사가 실수를 인정했다면 용서했겠지만, 많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환자를 대하는 의사들과 법을 집행하는 판사들은 약자 편에 서야 하는 것 아닐까요. 지금은 용서를 했다기보다,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 치열해서 잊었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누군가“잘사는 게 복수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맞는 거겠죠.

당신을 다시 일어나게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침 흘리는 모습이 창피하지 않니, 일어나서 혼자 밥을 먹자, 다시 학교를 가고 싶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린 겁니다. 회복이 중요했을 뿐 왜 일어나야 하는가를 생각할 겨를은 없었어요.

시력을 잃은 뒤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이었나요

사고 전에 목격한 한 여성 시각 장애인의 모습이 계속 떠오르더군요. 그 여성은 유독 황폐한 모습이었죠. 내가 그 여자처럼 되는 건 아닐까, 세상은 그런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런 생각이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시력을 잃는다는 건 어떤 건가요

자신을 잃어가는 거죠. 앞이 안 보이니까 취향이 없어지고, 밥을 먹을 때도 맛을 제대로 몰
라요. 그러니 사는 재미가 없죠. 제가 보는 걸 즐겨했던 사람인데, 삶이 무미건조해지는 겁
니다. 삶의 판단력이 흐려지고요.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면 삶의 색깔은 잊혀지게 됩니
다. 다시 공부하고,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엄마가 되면서
하나씩 색깔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절망이 긍정으로 바뀌는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왜 그때 날 수술하라고 했을까, 부모님에 대한 원망부터 사회에 대한 모든 원망을 했었죠. 세상을 향한 비탈진 마음이 부쩍 자랐어요. 그 마음을 바꿀 수 있었던 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오래된 성격 때문일 겁니다. 전 노력파였어요. 지금 삶에 100% 긍정적일까라는 의문이지만, 매 순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세상에 대한 원망을 잊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시력을 잃은 후에는 한편으로 강박증적으로 의지가 강해진 것 같습니다.

이제 세상과의 싸움은 끝난 건가요

사람들은 유학을 떠나 박사 학위까지 받는 화려한 외형을 두고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물론 지금 행복하지만, 피눈물 나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어요. 공부는 시각 장애인용 스크린 리더 프로그램을 통해 합니다.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죠. 그렇지만 공부가 만만한 게 아닙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면 한 학기에 사전 다섯 권 분량의 책을 읽어야 해요. 여러번 듣다 보면 귀가 아파서 토할 정도입니다.

“시댁 어르신이 시각 장애인이라 남편은 저를 잘 이해해 주죠. 부모님은 놓치는 세세한 부분까지 잘 챙겨줍니다. 남편을 만난 건 기도의 응답이었죠.”

그렇게 힘든 공부를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부모님이 계속 공부하라고 응원을 해줬어요. 그 말에 따르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장애인이 대우를 받는 세상이 아니잖아요. 세상은 힘없는 약자를 돌봐주지 않아요. 약자는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찾아야 하고, 제게 그것은 공부입니다. 또 하나, 공부는 앞으로 살아갈 예승이를 위한 일입니다. 혹시 엄마 때문에 밖에서 놀림을 당할 수 있잖아요. 아들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고 예승이가 살아갈 세상은 편견이 없었으면 합니다.

예승이의 얼굴은 어떻게 그려지나요

전 예승이를 보고 있어요. 가까이 들여다보고 만지면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아요. 뱃속에 있을 때부터 너무 예쁜 아이였죠. 아이 얼굴을 못보고 엄마 역할을 못해서 좌절하고 실의에 빠지면 어떻게 하나, 또 우울증에 걸리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이 많았는데, 엄마 배가 아파 낳은 자식은 다르더군요. 아기 우는 소리만 들어도 젖이 나오는, 모성이 강해지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김기현씨는 이날 아기의 우유를 직접 타고 기저귀를 갈아줬다. 새 기저귀를 찾느라 잠시 손이 분주했지만, 익숙한 엄마의 모습이었다)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한 걱정은 없었나요

기도를 구체적으로 했어요. 가족 중에 저와 같은 시각 장애인이 있는 사람, 믿는 가정에서
성장한 신앙이 좋은 사람, 요리를 잘하고 아기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 나와 함께 공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게 해 달라고요. 시댁 어르신이 시각 장애인이라 남
편은 저를 잘 이해해 주죠. 부모님은 놓치는 세세한 부분까지 잘 챙겨줍니다. 남편을 만난
건 기도의 응답이었죠.

살면서 남편의 표정을 몰라 답답하지는 않나요

남편이 피곤한 얼굴인지, 아닌지 모르니까 남편에게 자꾸 도와달라는 말을 해요. 착한 남편
은 내색 없이 도와주지만, 늘 마음 한편에는 미안한 마음이 있죠. 부부 싸움도 그래요. 남
편의 얼굴이 빨개져 폭발 직전이면 그만 스톱할 텐데, 그런 배려를 못해서 늘 미안하죠.

가끔 가족을 위해 요리도 하나요

요리는 감각인데, 미국에서 공부하는 3~4년동안 요리를 남편에게 맡겼더니 그 감각을 잃었어요. 앞으로는 가족을 위한 요리를 해주고싶어요.

여전히 시력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나요

물론이죠. 늘 세상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하지만 이십대에 멋 내고 데이트할 때,저는 눈에 침을 맞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어요. 그래도 그런 시간이 헛되지 않은 게, 그만큼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눈에 대한 미련을 버린것 같아요. 눈이 보이면 좋겠지만, 다시 그런 고통스런 노력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

4월에 다시 미국으로 떠나죠.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아이오와대학에 합격했고, 위스콘신대학은 통보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5년 정도 재활 상담
박사 과정을 밟게 됩니다. 재활 상담은 장애인 스스로 직업적 역량을 키우는 것을 도와주는 분야죠. 국내에는 아직 그 분야가 드물어요.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도와주는 일이라 보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남편, 가족들과 상의해서 이번 유학은 혼자 떠날까 생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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