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 칼럼

고이즈미의 방북 성적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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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5월 22일 북한을 방문했다. 2002년 9월 첫 방문에 이어 두번째로, 일본인 납치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었다. 첫 방문 때 납치피해자인 두 부부와 소가 히토미를 동반하고 귀국했던 고이즈미 총리는 이번엔 두 부부의 자녀 5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납치문제의 두가지 중요 현안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첫째는 2년 전 귀국한 납치피해자 소가의 남편과 두 자녀의 귀국문제다. 소가의 남편 찰스 로버트 젠킨스는 탈영해 월북한 미군병사인데 미국의 처벌을 우려해 고이즈미 총리가 직접 설득했는데도 일본행을 거부했다. 둘째는 납북된 것으로 보이는 일본인 행방불명자 10명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북한 측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납치피해자 가족들은 고이즈미 총리의 귀국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방북에 대해 "우려했던 최악의 결과가 현실로 나타났다"고 평가했다. "총리는 자존심이 있느냐" "이건 정말로 애 취급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들의 비난은 TV 뉴스를 통해 전국에 중계됐다.

하지만 이번 방북은 전국 여론조사에선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는 응답자가 60% 이상이었으며 내각 지지율도 10% 정도 뛰었다. 한달이 지난 지금도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여전히 70%를 웃돈다. 여론은 어쨌든 직접 협상으로 일본인 자녀 5명을 데려온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같다. 사실 납치피해자 가족들도 회견 첫 부분에선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방송에는 이들이 총리를 비난한 부분만 나왔다.

때문에 최근 납치피해자 가족 연락회는 조금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자녀까지 귀국한 회원과 아직 가족의 생사조차 모르는 회원들 간의 화합이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안타깝게도 이들 납치피해 가족은 북.일 간 납치피해자 문제가 전개되는 양상에 따라 또 한차례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다. 소가 히토미가 발언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복잡한 걸까요"라는 말은 이들의 아픔을 대변한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번 방북에서 정치적으로 큰 성과를 거뒀다. 지지율이 올랐고, 방북 전 국내 정국의 최대 쟁점이던 정계의 연금 미납문제가 잠잠해졌다. 다음달 치러질 참의원 선거는 집권 자민당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또 G8(주요 7개국+러시아) 정상회담에서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회담 내용을 직접 소개했다. 그 결과 G8 정상회담에서 북한문제를 주요 의제로 다뤘고 일본인 납치문제도 거론했다. 외교면에서도 방북 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국제관계의 관점에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일본 입장에서는 납치문제가 가장 중요한 과제이지만, 전 세계가 주목하는 북한 핵문제를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다. 게다가 핵문제의 진전이 없는데도 일본은 대북 경제원조와 인도적 지원을 재개키로 했다.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이번 방북을 비롯한 일련의 북.일관계 변화가 대북 강경입장이라는 기존의 미.일 공동 보조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G8 정상회담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김 위원장이 북.미 직접 대화를 원한다는 뜻을 전달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이를 거부하고 6자회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또 소가 히토미의 남편 젠킨스가 일본행을 결정할 경우 기소를 면제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부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 방북의 가장 큰 수혜자는 북한이다. 불법 납치한 일본인 자녀 5명을 돌려준 것만으로도 일본의 경제원조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북한은 아무것도 잃은 게 없다.

고쿠분 료세이 게이오대 동아시아연구소장
정리=박소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