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기 전 청장, 몸은 떠났지만 마음은 아직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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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 김석기입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가 지난주 받은 편지의 첫 구절이다. 보낸 사람은 용산 철거민 사망사건의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난 김석기(사진) 전 경찰청장 후보자다. 겉봉투에도 ‘서울 서초구 역삼동 XX하이츠 김석기’라고만 써 보낸 A4지 3장 분량의 편지에서 김 전 후보자는 경찰 조직에 대한 걱정을 쏟아냈다. 특히 “최일선 현장에서 국민의 안녕을 위해 일하는 경찰관의 사기는 중요합니다” “이번 일로 경찰관들의 법 집행이 위축되지 않도록 격려해 주기 바랍니다” 같은 문장이 여러 차례 되풀이됐다. 김 전 후보자는 이런 편지를 각계각층의 지인 수백 명에게 보냈다. 30여 년간 몸담은 경찰을 떠나며 사회 전체를 향해 ‘후배들을 고운 눈으로 봐 달라는’ 메시지를 남긴 셈이다.

경찰을 위한 김 전 후보자의 ‘물밑 행보’는 이뿐이 아니다. 정부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그는 지난달 10일 퇴임 직후 토요일(14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용산 철거민 사망자 추모 촛불집회 현장에도 암행을 했다. 자신의 사퇴로 시위가 진정됐는지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 챙이 넓은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나왔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김 전 후보자는 서울경찰청의 한 간부가 알아보고 부르자 ‘조용히 하라’는 눈짓만 주고 사라졌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또 김 전 후보자는 10일 열린 고 김남훈 경사의 49재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그는 특히 텁수룩한 수염도 면도하지 않은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 김 경사는 용산사건 당시 경찰 측 사망자다.

이런 김 전 후보자에 대해 경찰 고위 관계자는 “개인적 아쉬움보다는 경찰 조직에 대한 걱정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같다”며 “유능하고 열정적인 선배를 잃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전 후보자의 최근 행보를 놓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퇴임 직후임에도 국가정보원 차장으로 하마평이 나왔던 상황에서 분주한 발걸음이 자칫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걱정이다.

◆MB “유임시키자는 사람은 없나”=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은 용산사건 수습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던 지난달 초 참모회의에서 “김(석기) 후보자를 유임시키자는 의견을 내는 사람은 왜 없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참모들이 김 전 후보자의 교체는 기정사실화한 채 경찰 사기 진작책만 논의하자 다소 언성을 높여 한 말이라고 한다. 이런 대통령의 반응 때문에 당시 청와대 주변에서는 “이 대통령이 김 후보자의 경찰청장 임명을 강행할 수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었다.

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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