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살 깊은 '老村'] 下. 가까운 곳에 보건지소 늘렸으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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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 노인들은 병원을 찾기도 쉽지 않다. 바쁜 농사일에 병원마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경북 문경시 생달리 이옥순(66)씨가 아픈 무릎관절에 부항을 뜨고 있다. [문경=조문규 기자]

"이웃 아제(아저씨)가 아니었으면 나는 마당에서 그대로 죽었을 것이여."

전남 고흥군 두원면 관덕리 예동마을 정점엽(84) 할머니.

20여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 5남1녀의 자녀마저 서울 등지로 떠나보내고 혼자 사는 정 할머니는 "지난해 봄 가까스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새벽에 화장실에 다녀오던 중 급성맹장염으로 마당에 쓰러졌다가 이웃 주민에게 발견돼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했다.

정 할머니의 수술을 맡았던 당시 고흥종합병원 의사 박태석씨는 "고령인 데다 조금만 늦게 병원에 도착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말했다. 주민이 이장 김해근(64)씨에게 연락하고, 김씨가 고흥읍내 병원에 신속히 구급차를 요청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경북 문경시 동로면사무소는 최근 전화번호부를 새로 만들어 농가에 한부씩 배부했다. 이 전화번호부는 집 전화와 휴대전화 번호가 같이 기재된 것이 특징이다. 최돈기 면장은 "노인분들이 농사일을 하다가 혈압으로 쓰러지는 등 위급한 상황이 종종 발생해 구급 차원에서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 넣은 것"이라고 말했다.

농사일이 바쁜 데다 노인들의 경우 질병에 대한 무관심으로 병을 키우기도 한다.

2남1녀의 자식을 서울에 보내고 부부가 단둘이 살던 동로면 생달1리 한대석(68)씨는 요즘 혼자서 산다. 부인이 두달 전 췌장암 판정을 받고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입원치료 중이기 때문이다.

한씨는 "집사람이 오래 전부터 몸이 아프다고 했는데도 설마 죽을 병이야 들었겠느냐고 방심한 게 화를 불렀다"며 자책하고 있다. "문경의료보험조합이 2년에 한 번씩 검진을 받으라고 했지만 농사일이 바쁜 데다 농사꾼치고 한두 군데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느냐는 생각으로 흘려 지나친 게 못내 후회된다"고 했다. 부인이 병원에 입원한 뒤로도 한씨는 농사일 때문에 문병도 두번밖에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동네 부녀회장 신금분(63)씨는 "얼마 전 암보험에 들려고 우체국에 갔다가 '60세가 넘으면 가입이 안 된다'고 해 헛걸음을 했다"며 "보험도 사람을 가려가며 받느냐"고 하소연했다.

장애인 자식을 둔 농촌 노인은 그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다.

충북 보은군 회북면 용곡2리 김순진(70)할머니는 농사를 지으며 41년째 중증 장애인 아들을 돌보고 있다. 자신도 만성 디스크와 신경통으로 고생하는 몸이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지난달 세상을 떠났다.

김씨는 누워 지내다시피 하는 막내아들(41)에게 지금도 밥을 먹여주고 대소변을 받아낸다. 근력이 부쳐 혼자 목욕시키는 일도 여간 고역이 아니다. 1200평 논의 물꼬를 보러 자주 들에 나가야 하지만 아들 걱정 때문에 곧장 돌아와야 한다.

평생 농사를 지은 노인들은 대부분 병 하나씩을 안고 산다. 용곡2리 이장 강병조(56)씨는 "60대 이상은 대부분 관절염에 걸려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을 제대로 못 펴는 할머니들이 많고…. 아예 들에도 약봉지를 들고 다닙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농촌 보건소를 찾는 환자는 늘어만 간다. 의사와 치과의사.한의사 등 공중보건의 3명이 근무하는 보은군 회북면 서부통합보건지소는 농한기에 하루 70~80명, 농번기엔 40명 정도의 환자들이 찾는다.

지난해의 경우 1만3070명이 진료를 받았으며, 이 중 65세 이상이 7760명으로 60%에 이른다. 이는 4년 전에 비해 약 50% 늘어난 수치다.

질환별로는 관절염이 가장 많고(2274명), 다음이 고혈압(1800명) 순이다. 이곳 보건지소의 관할 인구는 회북면 2314명과 회남면 843명을 합쳐 3153명. 지난해에만 1인당 네차례 이상 다녀간 셈이다.

보건지소 이보경(39)간호사는 "노인들 대부분이 농사일 때문에 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병을 악화시킨다"며 "게다가 혼자거나 노부부끼리 살다 보니 이동이 불편해 제때 보건소를 찾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상당수 주민들은 쑥뜸기 등 기본적인 자가치료기를 갖추고 있다. 몸이 아프다고 항상 병원이나 보건소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동마을 유야복(79) 할머니는 "노인들이 쉽게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동네 가까운 곳에 보건지소라도 늘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송의호.안남영.장대석.구두훈.김관종 기자<yeeho@joongang.co.kr>
사진=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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