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산다]전남 장흥의 소설가 한승원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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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보성만과 고흥반도가 내려다 보이는 전남장흥군안양면사촌리 율산마을. 언덕배기에 서 있는 집에서 껑충한 키와 마른 체구, 옥양목 홑바지와 모시 적삼차림으로 맞는 주인이 한 마리의 학 (鶴) 을 연상시킨다.

고향바다를 무대삼아 원초적 생명력과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민족적 비극을 그린 '목선 (木船)' 으로 지난 68년 등단, '아제아제 바라아제' '해일' 등 작품을 쓴 소설가 해산 (海山) 한승원 (韓勝源.58) 씨.

광주에서 10년간 교편을 잡으면서 소설을 쓰다 79년 상경했던 韓씨가 17년의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탯자리인 장흥군회진면에서 승용차로 30분거리로 낙향한 것은 지난해 9월. 부인과 차를 타고가다 눈에 들어온 파밭 1백40여평을 사 30평의 집을 짓고 '해산토굴 (海山土窟)' 이란 현판을 걸었다.

평범한 단층양옥이지만 거실 창너머로 바다와 득량도, 멀리 고흥반도가 펼쳐지고 해바라기가 둘러 선 마당에선 고추.콩.호박.쑥갓.차나무가 자란다.

"처음엔 며칠씩 와 쉬면서 글을 쓰다 가고, 같이 소설을 쓰는 아들 동림 (東林) 과 딸 강 (江) 이랑 함께 작업실로 사용하려 했죠. 65세 넘어 완전 낙향하려 했었는데 짐을 모두 싸들고 아예 내려와 앉았습니다. "

나이 먹어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인생 은퇴가 아니라 걸리적거리는 것을 모두 버린채 제2의 작가 인생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9남매중 차남이지만 장남 노릇을 하는 바람에 좋은 문학적 재료를 돈으로 만들기 위해 물타기를 했잖느냐는 부끄러운 생각이 없잖았습니다. "

서울에서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너털거리거나 쓸데없는 모임에 나가는 일들이 없어져 글쓰는 시간이 훨씬 많아진게 무엇보다 좋다.

장흥에 내려온 뒤로 서울서 시작한 자전적 형태의 성장소설 '해산가는 길' 을 완성해 출간했고 장편동화 '별아기의 바다꿈' 도 썼다.

요즘은 스스로 고향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아름답고 슬픈 사랑이야기 '장흥환타지' (가제) 의 마무리 작업중이다.

"아침에 뒷산을 한바퀴 돌고 오후 해질무렵 바닷가를 산책할 때마다 내려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

서울은 원래 시장 (市場) 일 뿐이다.

장흥읍에서도 한참 떨어진 시골이지만 원고는 팩시밀리로 보내주고 원고료.인세는 온라인 통장으로 받으니 전혀 불편할 게 없다.

부인이 서울에 가는 보름동안 외로움을 느낄 때면 컴퓨터앞 벽에 써붙인 '내가 혼자 서 있을 뿐, 그 하늘 위 그 하늘 아래서 (天上天下 唯我獨尊)' 를 다시 음미하곤 한다.

적당한 고독은 작가에게 오히려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옥수수.감자.낙지.조개등을 싸들고 옵니다.

처음에 술이 거나해 놀러오던 사람들도 요즘엔 일하는 걸 방해하지 말자고 자제해 주고 있습니다. "

韓씨는 최근 마음의 짐을 한번 더 걸머져야 했다.

회진면신상리 새터말 고향사람들이 공적비를 세운다길래 만류했더니 지난 11일 마을에 문학현장비를 세운 것이다.

"고향에 빚을 진 사람은 나인데 그들이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아 이에 보답하는 길은 좋은 작품밖에 없겠죠. "

장흥 = 이해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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