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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서역에서 헤매다]1.나를 키운 것은 진리가 아니고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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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젊음과 순정과 인간세상에 대한 그만큼의 분노로 오늘도 활화산 같이 터' 오르는 시인 고은. 그가 서역만리(西域萬里)를 '헤매고'왔다. 여느 여행 같은 풍물기행도, 그렇다고 신라승 혜초(慧超)와 같은 구도(求道)의 길도 아니었다. 한때의 승려에 이은 허무주의자 그리고 불끈 쥔 주먹의 참여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삶과 지식을 초라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자연과 그 자연을 살다간 역사가 얼마만큼 광대하고 황량하면 우리시대 대시인의 혼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 초라한 혼으로 하늘과 맞닿은 히말라야에서 무엇을 보았고 인간들을 향해 무어라 말할 것인가. 고씨의 '고은 서역에서 헤매다'를 일요 연재한다.

무턱대고 날아가는 것이 새가 아니다. 아무리 날아보아야 두 날개 걸릴데 없는 하늘이건만 무궁한 하늘에도 엄연히 새의 길이 있다.

하늘 아래 첩첩산중에도 새의 길(鳥道)이 있고 뭇짐승들이 저마다 다니는 은밀한 길이 있다.

이런 자연의 생명들로부터 배운 것이리라. 태고 이래 사람에게도 사람의 길이 있게 되었다. 나도 그런 길이 있으므로 그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한 편서풍이 불어오는 곳으로 길은 끝간데를 몰랐다.

생각컨대 나를 키운 것은 진리가 아니라 길이었다.

누가 진리를 말하는가. 진리를 말하자마자 진리는 손상된다. 진리를 증명하는 자는 그것을 왜곡시킨다. 진리에 이름을 붙이고 체계를 짜고 그 종교를 나누면 그것은 질식되고 만다. 진리를 믿으라고 외치는 자 또한 그것을 파묻어버리는 것이다. 이른바 주둥이를 열자마자 잘못(開口卽錯)일 터.

이런 판에 무슨 도(道)를 새삼 말하리. 무슨 도가 있어 그것을 찾아간다 하리.

오직 바라는 것은 나이 스무살 무렵의 부푼 가슴이었다. 그런 가슴이 되어 그저 길을 떠났을 따름이다. 범어 '마르가(marga·末伽)'는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통로를 뜻한다. 그 통로를 도라 하겠다.

그럴진대 나에게도 목적지가 없을 턱이 없으므로 길을 가는 나그네였다. 실로 여한 없이 달리고 달린 먼 길이었다. 몇천㎞의 고행이 그 길의 밤낮을 만들어주었다.

중국의 인민일보(人民日報) 제1면은 '문명을 갈고 새 바람을 심는다(耕文明樹新風)'라는 표어를 쩌렁쩌렁 내세우고 있거니와 내 마음은 아무런 구호도 지니지 않은 채였다. 오랜만에 마음을 비우라는 말이 거짓말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으나 나 자신도 그런 구호 없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중국 황하 중류 시안(西安)에서 여정이 시작되었다. 당나라 서울 장안(長安)이었다. 고대 국제도시 장안은 전한·수·당 3대를 비롯한 11왕조 1천여년의 도읍 말고도 실크로드의 기점인 것이다.

중국 최대 시인 이백(李白)이 노래한 8세기의 장안은 인구 1백수십만,서방의 바그다드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열린 도시였다. 지금은 인구 6백만이다.

당나라 구도승 현장(玄奬)은 그의 운명이 시작되는 해에 29세였다. 그가 인도의 대사상가 세친(世親)의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만났을 때의 환희는 더 큰 환희를 향하는 사건이었다. 그는 직접 인도로 갈 뜻을 세웠다. 그것은 목숨을 건 일이었다.

그의 주청을 받은 태종은 출국을 엄금했다. 서역 각국의 정정이 불안하다는 이유는 구실만이 아니었다.

627년(貞觀1년) 가을이었다. 그는 벌써 인도로 가는 꿈을 꾸었다. 첫번째 꿈은 그가 태어나자마자 흰 옷을 걸치고 인도로 떠나는 그 자신을 어머니가 허락하는 꿈이었다.

두번째 꿈은 놀랍게도 바다 한복판에 솟아있는 수미산(須彌山-수메르산·카일라스산)에 그 자신이 오르기 위해서 바다를 헤엄쳐가는 꿈이었다. 망망하기만 한 바다 위에 돌연 꽃이 떠서 그의 징검다리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그 바다가 다하자 이번에는 회오리바람으로 그를 수미산 정상까지 날라다주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꿈 말고도 장안 서시(西市)의 페르시아 점장이한테 가서 점을 쳤다. 점장이는 그에게 주저하지 말고 떠나라고 격려했다.

서시라면 장안의 동시(東市)와 함께 국제적인 저자의 하나였다. 이백이 장안 궁궐에서 추방되기까지 술은 장안 교외의 명주 신풍주(新風酒)나 장안 장락방(長樂坊)에서 빚은 명주를 마시다가 서시의 페르시아 술집에 파묻혀 그 곳 호((胡姬·페르시아 여자)와 어울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날의 시안에서 제법 큰 거리의 이름이 태백로(太白路)가 되어 세계적인 긍지가 되고 있는 이백을 기념하고 있고 이백기념관도 설치되어 있다.

문화혁명의 시련을 겪은 궈모뤄(郭沫若)는 평전 '이백과 두보'에서 이백을 훨씬 중국인민과 가까운 민중시인으로 그려놓고 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소엽(素葉)이라고 표기된 중앙아시아 키르키스공화국 토크막에 해당하는 스이아브에서 이백은 태어났다. 어린 시절 사천 땅으로 들어온 것이다.

나는 지난날의 장안인 시안 거리에서 1백60종류 이상의 교즈(餃子·만두)중 '서태후의 진주'라는 콩알만한 것 세 알을 먹어본 뒤 이백의 머나먼 출생지가 있는 서역행 열차에 탔다. 2층 침대차였다.

정작 열차가 제 속력을 내자 거기에 실려가는 내 심사는 벌써 하염 없었다.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이런 시작과 목적 따위가 아무런 의미에도 연결되지 않는 표류의 실존,정신적 진공상태가 너무 일찍 찾아온 것이다. 그동안 내 자신을 반영시킨 영욕의 조국으로부터 한발짝도 떼어놓을 수 없었던 생활로부터 이렇듯 일탈을 누리게 된 기회는 나를 한층 더 무중력적이게 했다.

그러나 내 몸에는 벌써 중국의 향차이(香茶)인 고소와 그밖의 향신료에 의해서 내 체취가 없어지고 중국인의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열차 식당의 지저분한 주방도 차츰 낯선 것이 아니었다.

시안에서 자위관(嘉浴關)까지 1천몇백㎞. 시안에서 톈수이(天水)-란저우(蘭州)-우웨이(武威)-장예(張掖)-자위관은 특급으로도 꼬박 이틀이 걸리는 거리였다. 그러나 옛날에는 이승과 저승의 거리 아니던가. 시안의 서문은 명나라 때 축조된 성곽을 말해주지만 그 서성문(西城門)은 웅장했다.

그런데 당나라 때의 실크로드 기점인 개원문(開遠門)은 이름 그대로 멀리 멀리 열려 있는 문으로서 오늘날의 시안 부도심이 되는 곳에 있다. 거기에는 우람한 몸짓의 아랍인과 한족(漢族)관리 그리고 대상 일행이 타고 있는 쌍봉(雙峰)낙타들이 멀리 서쪽으로 향하는 대리석 조형물이 세워' 있다.

'안서(安西都督府)9천9백리'라는 표연한 이정표가 벌써부터 그 쪽으로 가는 나그네를 막막하게 만든다. 안서는 신장(新彊)위구르의 쿠차(庫車)지경이다.

이제부터 멀다 가깝다하는 말들은 가슴 깊숙이 묻어두어야 한다. 멀다니 어디서 어디까지 멀다하리. 가깝다니 어디서 어디까지를 가깝다하리.

뒤돌아보며 지난 날의 영화를 간직한 장안성은 대안탑·소안탑이 솟아 있는 하늘 아래 정관통치나 무후(武后)의 피비린내 그리고 현종과 양귀비의 탈정치에 이어지는 안녹산(安祿山)사건,거기에 이어지는 이백의 호방하고 굴절 많은 시인의 생애가 있었으며 이에 앞서 구도승 현장의 출국과 귀국의 영광이 있었던 것이다.

장안은 예로부터 모란꽃 감상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품격에서 빠질 수 없었다. 꽃 중의 꽃인 모란은 그대로 사람 중의 사람에 의해서 그 아름다움을 피워낸다.

장안 동시에서 살았던 백낙천(白樂天)은 노래하고 있다.

'바야흐로 피어나는 모란꽃'을 노래하면서 벗들을 불러 그 꽃을 사러가자고 재촉한다. 바로 이 장안의 모란 감상의 한쪽이 신라에도 전해왔다.

신라의 젊은 승려 무상(無相)·자장(慈臧)·도의(道義)·범일(梵日),그리고 최치원등이 건너왔다.

그 가운데 무상은 당나라뿐 아니라 고도 9천m 이상의 티베트까지 가서 그곳의 불교지도자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서역만리의 여수(旅愁)로 대륙의 무심(無心)가운데 들어갔다. 그것은 역사의 오지와 만나는 내 비원이 성취되는 일이기도 했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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