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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이 책과 주말을!] 원로 소설가 귀거래사 "나, 아직 짱짱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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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시방 여그가 그 꽃자리여
한승원 지음, 김영사, 312쪽, 1만1900원

소설가 한승원(66)씨는 9년 전 서울을 버리고 고향인 전남 장흥 바닷가로 돌아갔다. 미역냄새 짭조름하고 대밭 푸른 그곳에 몸 부릴 곳을 짓고는 스스로 '해산토굴'의 주인이라 했다. 한 걸음 나서면 바다요, 두 걸음 옮기면 산이 맞아주는 풍경 속에서 그는 "우리는 늘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깨달았다. 나그네처럼 남도를 떠도는 그의 발길을 따라나선 우리 또한 처음으로 돌아간다.

생명을 준 땅에 엎드려 그 자궁 속으로 속살을 헤치며 들어선 작가는 신명에 겨워 영혼에 불을 댕긴다. 매화꽃이 폭죽처럼 팡팡 터지는 섬진강변에서 "나도 아직 짱짱흐다. 그래, 나는 아직 사랑할 수 있다" 한다.

지리산 노고단에 올라 "번개처럼 번쩍 일어나는 불빛에 내 머리통을 처넣은 채 기절하고 싶다" 한다. 광주 망월동 묘지에 가서 "우리는 망월동의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다" 한다. 항구는 꿈꾸고, 나무는 고독을 보듬으며,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빈손으로 와서 맨발로 살다가 호주머니 없는 옷을 입고 저 세상으로 바람같이 사라져가는 우리 아닌가."그리하여 그는 장천재 동백꽃 앞에서 몸과 마음을 열고 인생을 말한다.

"모두가 어우러져 화평하게 살고, 죽을 때에 통으로 된 동백꽃잎처럼 떨어져 시들어지는 운명을 함께하는 삶." 김영랑 시인이 '오메, 단풍 들것네'라 노래했다면 한승원씨는 '시방 여그가 그 꽃자리여'라 읊조린다. 누구나 제 마음의 지도 한 장씩 품고 떠난다면 거기가 꽃자리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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