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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융위기와 정부의 역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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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조지 소로스는 이번 금융위기는 외부 충격 때문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이번 위기는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경제자유주의·경제근본주의 등 여러 이름으로 일컬어져 온 자유시장 이념이 낳은 결과다. 정부의 역할을 축소해 궁극적으로 시장의 힘이 이를 대신해야 한다는 것이 자유시장 이념의 핵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규제되지 않은 시장의 힘이 자본주의를 어떻게 위기로 몰아넣는지 목격했다.

세계 금융시스템은 위험을 분산시키기보다 오히려 심화시켰다. 신자유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의 힘으로 금융시장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조셉 스티글리츠의 말대로 보이지 않는 손이 안 보이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공황 이후 미 자본주의를 재건하고, 케인스에 크게 영향을 받은 미 민주당이 제2차 세계대전 후 내수를 진작하고, 유럽 재건을 위한 마셜플랜을 시행하고, 국제 경제를 관장하는 브레턴우즈 체제를 탄생시켰듯이 국가경제와 국제경제시스템을 재건하는 것은 우리 세대의 몫이다. 자본주의를 구하려면 우리는 세 가지 도전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시장에 대한 적절한 규제 체제를 마련하고, 내수와 글로벌 수요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국가의 힘을 활용하는 것이다. 펀더멘털로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현 위기에 맞서 국가는 민간 금융시스템을 붕괴 위기로부터 구하고, 직접적인 실물경제 부양책을 제공하고, 국내 및 국제적 규제 체제를 마련하는 등 세 가지 분야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둘째 도전은 목욕물을 버린다고 아이까지 함께 버리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경제위기의 심화와 함께 실업의 공포가 확산되면서 국가가 모든 것을 제공하는 모델로 회귀하고, 개방적이고 경쟁적인 시장의 가치를 포기하라는 압력이 커질 것이다. 1930년대의 스무트-홀리 관세법보다는 덜하지만 정교하고 미묘한 형태의 보호주의가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수준에 관계없이 보호주의는 경기 침체를 불황으로 몰아넣는 확실히 위험한 정책이다.

현 위기 상황이 전례가 없을 정도로 세계적이라는 점은 셋째 도전이다. 각국 정부는 규제가 가장 취약한 쪽으로 자본이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일관성 있는 글로벌 금융 규제책을 고안해야 한다.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기관들에 대해서는 보다 엄격한 국제적 공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또 임원들의 보수 체계를 포함, 보다 책임감 있는 기업 행동에 대해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강력한 감독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국제적 공공기관이 21세기의 요구에 맞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주요 20개국(G20) 차원에서 정부 간 행동을 조율하는 것도 중요하다. IMF의 지배구조는 개혁돼야 한다. 중국 등 급속히 성장하는 나라들이 IMF에 더 큰 기여를 하기 바란다면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들이 지금보다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두 가지 진실은 이미 확립됐다. 하나는 금융시장이 항상 스스로 잘못을 시정하거나 스스로 규제하진 않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정부가 경제 안정에 대한 책임을 포기할 순 없다는 점이다. 정부가 제대로 해야 한다. 자유시장 체제를 자멸의 위기에서 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적절하게 규제된 시장에 대한 신뢰를 확립함으로써 극좌파나 극우파가 극단적 행동에 나서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케빈 러드 호주 총리


◆이명박 대통령의 호주 방문을 앞두고 케빈 러드 호주 총리가 중앙일보에 특별히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