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사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관(官)이 향기로운 너는/무척 높은 족속(族屬)이었나 보다'(노천명의 '사슴' 가운데서).

시인의 감성은 정확했다. 우리 민족에게 사슴은 늘 '높은 족속'이었다. 까마득히 오래 전부터 그랬다. 역사 이전의 시대, 흔히 알타이어족(語族)으로 통칭되는 아시아 대륙 북방 민족의 핏줄 속에 형성돼온 샤머니즘(무속신앙)과 애니미즘(정령신앙)의 관념에서부터 그래왔다. 시베리아 북방을 거쳐 한반도까지, 다시 알래스카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 인디언에 이르기까지 그 관념의 지평은 넓다.

사슴은 늘 하늘, 신(神)과 연관돼 있었다. 하늘로부터 신내림을 받은 샤먼, 즉 강신무(降神巫)는 집단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샤먼은 흔히 사슴의 뿔을 머리에 쓰고, 사슴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사슴은 하늘의 신과 지상의 대리인 샤먼을 이어주는 정령으로 간주됐다. 한민족의 먼 친척인 시베리아의 퉁구스.야쿠트족 사이엔 사슴을 동물신으로 숭배하는 전통도 있었다. 북미 콜롬비아 인디언은 조상의 영혼이 사슴의 몸에 머문다는 이유에서 사슴 고기를 터부시했다. 고대 아즈텍 신화 속 태초의 여신은 머리 두 개 달린 사슴으로 형상화됐다. 사슴이 태양을 운반하는 그림이 발견되기도 했다. 마야문명의 상형문자에서 죽어가는 사슴은 가뭄을 뜻한다.

한반도의 고대인들은 사슴 가운데서도 특히 신성한 사슴을 신록(神鹿)이라 했다. 곧 백록(白鹿), 흰 사슴이다. 현대과학에서의 돌연변이가 샤머니즘 시대엔 그 희소성으로 신성시됐다. '동국이상국집'에 따르면 동명왕은 흰 사슴을 잡아 거꾸로 매달고 하늘에 비를 내려달라고 기원했다. 사슴의 울음소리를 듣고 천제(天帝)가 비를 내렸다. 흰 사슴이 하늘과의 채널이 된 셈이다. '삼국사기'에서도 왕이 흰 사슴을 진상받아 잔치를 베풀고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적지 않다.

경북 봉화에서 태어난 흰 사슴이 8일 만에 밟혀 죽었다. 신성시할 것까진 없지만 너무 호들갑떨 일도 아니었다. 샤먼이 사라진 시대에 길조(吉兆) 여부를 논하기에 앞서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이란 표현이 가슴에 와닿는다.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고/어찌할 수 없는 향수(鄕愁)에/먼 데 산을 바라본다'던 사슴.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