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분초의 벽'에 울고 웃는 신 - 구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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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속기인 세계대회에 이어 TV속기시대가 도래하면서 신구의 세대교체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사진은 TV바둑의 효시인 KBS 바둑왕전 패자조 결승전, 조한승7단(左)과 박병규4단의 대결. 가운데는 우승자 송태곤7단(우승자). [한국기원 제공]

바야흐로 속기(速棋)전성시대다. TV바둑의 제한시간은 불과 5~10분. 아예 처음에 초읽기로 시작하는 대회도 있다. 바둑 한판에 도끼자루 썩는다던 신선놀음이 숨가쁜 속기대결로 바뀐 것이다. 최선을 추구하는 예도(藝道)로서의 바둑도 옛날 얘기다.

많은 대국이 TV 시청자들의 입맛에 맞는 속기로 치러지면서 저승사자처럼 쫓아오는 초읽기 대국과 이에 당황하는 프로기사의 모습은 흔한 풍경이 됐다. 장고의 대명사인 바둑에서 초읽기와의 대결이 새로운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1960년대의 일인자 김인9단은 KBS가 처음 TV속기대회를 열었을 때 참가하지 않았다. 김인 9단의 눈에 TV속기는 대회라기보다는 이벤트였다. 이 젊잖은 구시대의 고수는 한수에 몇시간이고 생각할 수 있는 분위기 속에서 오랜 세월 바둑의 품격을 익혀왔기에 뜨거운 조명 아래 땀을 흘리며 초읽기에 쫓겨 번개같이 돌을 놓는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요즘은 초를 읽어주는 계시기까지 등장했다. 예선전마다 사용되는 이 계시기는 젊은 기사들에겐 익숙한 반면 노장들은 조작조차 서툴다. 조훈현9단도 얼마 전에 아차 하는 사이 시간패를 당하고 말았다.

'야전사령관'이란 별호와 함께 실전바둑의 고수로 통하던 서봉수9단도 속기의 희생자다. 마지막 초읽기 상태에서 그것도 여덟이나 아홉에서 가까스로 착점을 하는 서9단의 모습은 하도 위태위태하여 곧 시간패를 당하고야 말 것 같은 불안감을 준다. 그는 결국 수도 없이 역전패를 당했다. 서9단은 지금도 시간이 충분한 바둑에서는 경쟁력이 충분하다. 그러나 제한시간 10분의 한국리그에선 32명 선수 중 29번째에 가서야 겨우 4장으로 뽑혔다. 속기시대의 한 단면이다.

반면 소년기사나 젊은 기사들은 물 만난 고기 같은 모습이다. 이들은 손놀림도 능숙하여 아홉에 돌을 놓아도 안정감이 있다.

속기는 감각이 좋고 수읽기가 빨라야 한다. 계산도 빠르고 결단도 빨라야 한다. 특히 계산능력에서는 세대차가 뚜렷해 많은 승부가 막판 끝내기에서 역전된다.

18세 무렵부터 계산능력은 서서히 최고조로 올라가고 25세 무렵부터는 조금씩 하향세로 접어든다. 이세돌9단, 최철한8단을 필두로 요즘 주가를 높이고 있는 송태곤7단, 윤준상2단 등 많은 신진 강자는 30초 안에 계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반집 차이도 정확하게 안다. 그러니 반집 진 바둑에선 강하게, 반집 이겼으면 약하게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노장들은 두세집 이긴 바둑도 계산이 잘 안 된다. 이 대목이 가장 치명적이다. 상대가 강수를 던졌을 때 물러서야 하는지 싸워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은 바로 눈을 감고 싸우는 전략 부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각 40시간의 제한시간으로 둔 본인방 슈사이(秀哉)의 은퇴바둑은 '명인'이란 유명한 소설로 그려졌다. 수의 뿌리를 캐던 시절의 얘기다. 일본 3대 기전의 도전기는 아직도 각 8시간이지만 요즘 세계대회는 대부분 3시간이고 새로 생기는 TV용 대국은 10분을 넘지 않는다. 아마 대회에선 20초 1회로 싸우는 바둑도 생겨났다.

최선을 추구하던 예도의 시절은 지나가고 바야흐로 바둑판은 분초를 다투는 숨가쁜 격전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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