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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카의 여왕 김연자 ‘베일에 싸인 일본 생활·남편·집’ 독점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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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여성중앙일본에서 톱스타로 활동해 온 ‘엔카의 여왕’김연자가 21년 만에 국내에서 새 음반을 내놓는다. 일본과 국내 활동을 병행하며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것. 본격적인 활동에 앞서 그녀는 작정을 한 듯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톱스타로 사는 일본 생활과 가족이야기, 남편이 야쿠자라는 루머에 대한 속 시원한 해명까지.

취재_윤혜진 기자 사진 제공_김연자, Y음반

‘엔카의 여왕’가수 김연자는 1980년대 주 무 대를 일본으로 옮겨 21년 동안 활동해 왔다. 지금은 일본 진출 여가수 하면‘보아’를 떠올 리는 사람이 많지만 일본에 진출해 지금까지 톱스타로 활동 중인 그녀는 한류 스타의 원조 격이다. 최근 그녀가 한국에서 음반을 낸다고 한다. 21년 만이다.

“일본에서 낸 싱글 앨범만 31장이에요. 그런 데도 오랜만에 한국에서 녹음을 하려니 떨리더군요. 긴장을 하니까 한국어 발음도 잘 안 되고 나중에는 짜증이 다 나는 거 있죠. 이런 적이 없는데…(웃음).”

아무래도 늘 녹음을 하던 일본의 스튜디오가 아니어서 그런지 천하의 김연자도 긴장을 다했다. 새 앨범에는 송창식이 작사. 작곡한 노래‘안 돼’ ‘슬픈 얼굴 짓지 말아요’‘불꽃’과 히트곡‘수은등’‘아침의 나라에서’등이 새로 운 느낌으로 해석되어 담긴다. 신보 이야기를 전하며 그녀는 설레는 목소리였다. 고국의 무대에 설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기분이 좋은 그 녀다.


비자 얻기 위해 재일교포 남편 만나 결혼
야쿠자 소문과 달리 남편은 유명 지휘자

올해로 쉰한 살이 된 김연자는 가수로 데뷔한 지 35년째를 맞았다. 인생의 절반 이상 노래를 불러온 셈이다. 처음 가수로 데뷔하게 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노래를 좋아하던 아버지는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가수를 시키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녀가 열네 살 되던 해 가 수가 되라며 기어이 학교를 중단시키고 서울 로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는 서울에 올라 와 어렵사리 소속사를 구하고 앨범을 냈지만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일본에 서 활동하면 매달 월급을 받으면서 노래할 수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결국 그녀는 1977 년에 안정적인 수입을 찾아 일본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그녀는 이미자의‘여자의 일생’을 일본어로 불러 일본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수입만 좀 나아졌을 뿐 국내나 일본이 나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일본말도 할 줄 모른 채 무작정 건너온 탓에 고생길이 훤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힘들어할 무렵 지금의 남편 김호식씨를 처음 만났다.

“당시 남편이 오케스트라를 갖고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어서 스튜디오에서 자주 마주쳤어 요.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 가수가 많지 않을 때라서 제가 확 눈에 띄었나 봐요. 불쌍해 보였는지 잘해주더라고요(웃음). 남편 말로는 저를 보자마자 천생연분이라고 느꼈대요. 그런 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때 제 나이가 열여덟 살이고 남편은 저보다 딱 두 배를 더 산 나이였으니 한마디로 도둑놈이었죠(웃음).”

김호식씨와 그녀는 처음부터 결혼을 전제로 교제를 시작했고 3년 후 부부의 연을 맺었다. 결혼할 당시 그녀는 일본에서의 가수 활동이 잘 풀리지 않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지내 고 있었다. 스물한 살 어린 아가씨에게 장거 리 연애는 쉽지 않았다. 곧 그녀는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을 서둘렀던 또 다른 이유는 결혼 비자를 얻기 위해서였다. 일본에서 가수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매번 비자를 새로 받아야 했던 것. 그런데 재일교포인 남편과 결혼을 하고 나면 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됐다. 그녀 표현에 의하면“좋아하는 사람도 얻고 비자도 얻는 일석이조 결혼”이었다.

한국에 머물며 결혼 비자가 발급되기만을 기다리던 중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비자가 나오려면 6개월을 더 한국에 있어야 했는데, 그사이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음반 제작자 유 수태 대표를 만나 음반을 제작하게 된 것이다. 음반이 잘되면 계속 활동을 하고, 안 되더라도 일본에 가면 그만이란 생각으로 취입한 그 음 반이 대박이 났다. 그 이후 7~8년 동안 그녀 는 내리 히트곡을 냈다. 무엇보다 1988년 서 울 올림픽 폐막식에서 부른 노래‘아침의 나 라’가 일본에서 크게 인기를 얻어 다시 일본 에 진출할 수 있게 됐다.

“두 번째로 일본에 갔을 땐 아무런 신경 쓸 일 없이 노래만 부르면 됐어요. 그땐 남편이 제 매니저가 되어주었어요. 남편은 어떻게 하면 가수 김연자를 세계로 통하게 할 수 있을까 연 구하는 사람이에요. 어떤 때 보면 남편이 저보 다 더 제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같아요. 남편 이 야쿠자라는 등의 소문은 말도 안 돼요. 정 말 자상한 사람이에요.”

남편 김호식씨도‘야쿠자설’‘이혼설’등 부부를 둘러싼 여러 소문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 만 그는 무서운 야쿠자와는 거리가 먼 섬세한 예술가다. 아내의 일을 돕기 전까지만 해도 자 신의 밴드를 가진 가수이자 지휘자였다. 현재 는 김연자의 일본 내 기획사 대표직을 맡아 그 녀의 모든 스케줄과 수입을 관리하고 있다. 두 사람은 종종 밴드 지휘자와 가수로 한 무대에 사이좋게 오르며 애정을 과시하곤 한다. 심지 어 남편은 쉰이 넘은 아내를‘큰 아기’라고 부른다. 두 사람 사이엔 아이가 없다.

“남편과 강아지 세 마리와 도쿄 스기나미 구 에 살고 있어요. 강아지들이 자식이나 다름없죠. 가끔 자식 자랑하는 사람을 보면 속상하긴 해요. 저도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노력 좀 해보려 하면 큰 일이 터지는 바람에 좋은 기회를 2~3번 정도 놓쳤어요. 이제는 그냥 우리끼리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죠.”

18년이란 나이 차이와 한국과 일본이라는 문화의 차이를 극복한 닭살 부부지만 다시 안 볼 것처럼 다툴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서로 조 금씩 양보하며 갈등을 풀어나간다. 여느 부부처럼 지지고 볶으며 두 사람은 부부로서,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함께 걸어가고 있다.

아버지 부음 듣고도 5개월간
한국 오지 못한 사연은…

그녀는 1년에 100일은 콘서트, 100일은 방송, 100일은 음반 작업을 한다. 벌써 다음해 공연 스케줄까지 다 틈틈이 잡혀 있다. 국내 활동은 시간을 쪼개 할 예정이다. 그러나 그녀는 힘들더라도 국내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려 한다. 그 동안 한국에는 1년에 한 번씩 왔다갔다 했는데 앞으로는 국내 활동을 핑계로 좀 더 자주 올 생각이다. 그녀는 일본에서 활동하느라 지난해 8월 작고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기 못 한게 한이 됐다.

“국내에서 활동하면 일단 한국에 와 있는 동 안이라도 가족과 함께할 수 있잖아요. 지난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가족의 소중함을 크게 느꼈어요. 음반을 내고 한창 바쁠 때였는데 열흘 뒤에야 임종 소식을 들었어요. 제가 흔들릴까 봐 큰 공연부터 무사히 마치라고 알 리지 않으셨대요. 그 얘기를 듣고 수화기를 붙잡은 채 몇 시간을 울었는지 몰라요.”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듣고도 한걸음에 달려올 수 없었다. 일본 연예계는 우리나라보다 엄격해 스케줄을 펑크 내면 막대한 손실을 볼 수 있다. 당시 그녀가 스케줄을 취소하려면 약 100억 원 이상의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돈 때문에 일본에 갔지만 결국 돈 때문에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모습도 지켜보지 못하게 될 줄이야. 그녀는 장녀로서 면목이 없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불효를 갚기 위해 그녀는 한국 활동을 결심했다. 떠나보내고 난 후에 그리워하느니, 지금부터라도 가족의 정을 더 느끼고픈 마음에서다. 그러나 아직은 아예 한국에 정착할 계획은 없다. 그간 일본에서 활동해 온 세월이 아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분 간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할 예정이다.

“일본 생활은 정말 바빠요. 새 음반이 나올 때 마다 신인처럼 뛰어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20여 년을 그렇게 노래만 부르며 살아왔지요.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저는 죽을 때까지 노래를 하고 싶어요. 목소리가 허락하는 한 노래를 부르고 남은 생은 우리나라에서 보낼 거예요. 제가 뼈를 묻을 곳은 한국이죠. 귀화는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한국에서는 3월 1일, 일본에서는 4월 중 각각 다른 앨범이 나온다. 두 달에 한 번쯤 한국에 와서 일주일씩 머물며 국내 스케줄을 소화할 예정. 올해에는 프랑스, 중국 상하이 등의 해 외 공연 스케줄까지 잡혀 있지만 그래도 주 활동 무대는 일본과 한국이다.

“향수병에 시달리던 시절이 있었죠(웃음). 한 국인임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도 공연을 할 때 마다 한복 한 벌씩을 입어요. 하지만 향수병은 오래전 이야기죠. 저랑 함께 일하는 스태프만 50명이에요. 외로울 틈도 힘들 틈도 없어요. 지금처럼 엔화가 비쌀 때 일본에서 더 열심히 벌어서 한국에 투자도 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해 야죠. 예쁘게 봐주세요.”

오랜 일본 활동으로 깍듯한 인사 예절이 몸에 밴 그녀. 데뷔한 지 35년이나 지난 그녀가 신인처럼 예쁘게 봐달라며 웃는다. 갓 데뷔한 신인 가수처럼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니 지금까지 그녀가‘엔카의 여왕’으로 군림 해온 이유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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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_윤혜진 기자 사진 제공_김연자, Y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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