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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속의 문화유산]26. 석봉의 도산서원·추산의 茗禪·다산의 丁石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예술은 사람답게 살자는 노릇이고, 사람답게 사는 데는 참된 인간관계가 그 완성이자 조건의 하나다.

상대의 천품을 알아주고 서로를 부추길 수 있음은 삶의 보람이고 또한 예술이 만들어지게 하는 귀한 토양이다.

그래서 빼어난 예술문화 뒤에는 인연이 있던 사람의 사랑이 숨쉬고 있기 쉽고, 은밀하기 마련인 그 사랑이 드물게 세상에 알려진 경우이면 감동을 더해주는 신화로 다가온다.

감동의 신화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실감나는 귀감이 된다.

문화유산이 한낱 과거의 유물에 그치지 않고 지금 살아있는 역동을 증거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얼마전 우리 고전문학 연구에 더해 서예로도 일가를 이룬 팔십 노옹 이가원 (李家源) 교수의 행적에서 그걸 직접 목격했다.

현판 (懸板) 글씨를 쓰는 현장이었다.

어깨 넘어로 보고 있노라니 글자들을 역순으로 쓰기 시작한다.

'집운헌 (集雲軒)' 이라 적는데 '헌 (軒)' 자를 맨먼저, '집 (集)' 자를 맨나중에 쓰는 것이다.

예사롭지 않아 까닭을 물은즉 조부에게서 들었다는 당신 조상 퇴계 (退溪 李滉.1501~70)에 얽힌 고사를 일러준다.

공경심에 서예대가 손떨어 나라의 스승이던 그가 타계한 뒤 선생 생전에 향리에 세웠던 서당을 후학들이 도산서원 (陶山書院) 으로 키우자 선조대왕은 현판 글씨를 내리기로 하고 '떡썰기에서 배운 글쓰기' 신화의 주인공 한석봉 (石峰 韓濩.1543~1605) 을 어전에 앉힌다.

석봉이 종이를 펴자 임금은 먼저 '학교 원 (院)' 을, 이어서 '글 서 (書)' 그리고 '뫼 산 (山)' 을 쓰라고 거꾸로 글자를 부른다.

이윽고 '둔덕 부 ()' 변을 쓰게 하고 마침내 '질그릇 도 (도)' 를 부르자 석봉은 그제사 퇴계를 현창하는 글인 줄 안다.

도산서원의 '도 (陶)' 자를 쓰기 전엔 퇴계를 위한 것인지 몰랐다는 말인데, 그럴 법도 한 것이 서원 이름에는 옥산 (玉山) 서원 등 산 (山) 자가 든 서원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질그릇 도 (도) 는 '쌀 포 ()' 안에 '장군 부 (缶)' 를 쓴 글자. 천하명필의 붓도 그만 떨려 포자가 균제감 (均齊感) 을 잃고 만다.

대선비에 대한 공경심이 그의 손을 떨게 한 것이다.

석봉은 불만족스러워 임금에게 집에 가서 새로 잘 써서 바치겠다고 물러나온다.

그런데 집에서 아무리 써도 처음 쓴 것만 못해 결국 그것으로 현판을 새겼다 한다.

종이가 모자라 질그릇 등에다 글쓰기 공력을 쌓았다는 한석봉은 공문서를 적는 사자관 (寫字官) 으로 오래 일했다.

발군의 서예 덕분으로 미천한 출신임에도 선조의 총애를 입어 군수 벼슬을 지낼 정도였지만 비판없는 완성은 없는 지라, 진적 (眞跡) 인지가 분명치 않은 왕희지 (王羲之) 를 배워 숙달되긴 하나 속되다는 평을 받았다.

게다가 '대자 (大字) 는 소자 (小字) 보다 못해 둔중함을 면치 못했다' 는 평을 받고 있기에 '도산서원' 글씨 역시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거기에 대학자와 명필 (名筆)에 대한 선조 임금의 공경과 사랑이 진하게 스며 있어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석봉에 대한 비판은 조선시대 서예의 한 정점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1786~1857) 의 비평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추사의 글씨에도 인간관계의 따뜻한 정이 녹아있어 후세에 감동을 남긴 점은 서로 닮았다.

잊지 않고 귀한 책을 보내준 후학을 위해 제작한 '세한도 (歲寒圖)' 가 그렇고, 역시 유배생활을 위로해마지 않던 당대의 고승 초의선사 (草衣禪師.1786~1866)에게 답례한 '명선 (茗禪)' 이 그러하다.

'명선' 은 선가 (禪家) 의 말로서 차 한 모금에 선의 경지가 있다는 '선다일여 (禪茶一如)' 와 같은 뜻. 명 (茗) 은 우전차 (雨前茶) 같은 '일찍 딴 차 (早取曰茶)' 가 아닌, '나중에 딴 차 (後取曰茗)' 곧 가을차를 말함이다.

추사가 초의와 교유하기 시작한 것은 동갑인 두 사람의 나이 서른살 때. 한분은 도성 (都城) 출입이 금지될 정도로 천대받던 스님이고, 또 한분은 당대의 대감인데도 신분 격차를 뛰어넘어 한 평생 뜨거운 교유를 주고 받는다.

파란만장한 삶의 전주 (前奏) 로 추사가 제주도 유배길에 오르자 초의는 슬픔을 시로 달랜다.

"그대 보내고 고개 돌린 석양의 하늘/마음은 안개 가에 아득히 젖는데/오늘 아침 그 안개 따라 봄마저 가고/빈가지 쓸쓸히 꽃잎 떨구고 잠드네" . 서른살때부터 42년간 교류 그리고 인편이 닿는대로 초의는 이 땅의 다신 (茶神) 답게 제주땅으로 좋은 차를 보낸다.

끊이지 않고 오기를 고대한 차가 제때 오지 않으면 추사는 독촉편지도 쓴다.

"편지를 보냈는데 한번도 답은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스님도, 스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다시는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시오" 하고 적는다.

이뿐이 아니었다.

"새 차는 어찌하여 돌샘, 솔바람 사이에서 혼자만 마시며 도무지 먼 사람 생각은 아니 하는건가" 했고, 또 다른 편지에선 "어느 때나 부쳐보내 이 차의 굶주림을 진정시켜 주려는가" 하고 적었다.

드디어 차를 부쳐왔다.

"이 몸은 차를 마시지 못해 병이 든 것인데 지금 차를 보니 나아버렸네" 하며 아이처럼 좋아한다.

흥겨움은 명작을 낳는 원동력이다.

철골처럼 강건하게 쓰여진 '명선' 두 대자의 제발 (題跋)에 그런 사연이 적혀 있다.

'초의가 직접 만든 차를 보내 왔는데 중국 산서성 몽정산에서 나온다는 차에 못지 않다.

이 글로 보답하려고 한 (漢) 나라 때 백석신군비를 참고하여 세상사를 근심하는 선비가 예서를 썼다 (草衣寄來自製茗 不減夢頂露芽 書此爲報 用白石神君碑意 病居士隷)' 는 것이다.

그처럼 각별하게 지내던 추사가 과천에서 앞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윽고 초의는 전라도 해남에서 상가가 있던 충청도 예산까지 스무날을 걸어가 '이승에서 맺은 인연은 불과 42년이지만 전생의 인연은 수천백 겁이 넘는다' 며 제문을 짓고 통곡한다.

샘돌을 분신으로 삼아 추사와 초의의 사귐은 퇴계의 학풍을 따르던 정다산 (茶山 丁若鏞.1762~1836) 이 원인제공자다.

유배지로 다산을 찾아온 큰 아들 정학연 (丁學淵.1783~1859) 이 다산의 문하로 출입하던 초의를 만나 그를 추사에게 소개한 것이다.

유배의 땅에서도 경세에 대한 다산의 뜻은 식을 줄 몰랐다.

'조정에 있으면 백성이 걱정이고 강호 (江湖)에 처 (處) 하면 임금이 걱정' 이라 했던 선비의 도리를 더욱 다짐한 끝에 저 유명한 '목민심서 (牧民心書)' 를 저술한다.

아전 (衙前) 을 제대로 단속해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는 내용인데, 아전의 발호가 극심했던 전라도 땅 강진에서 직접 목격한 학정 (虐政) 이 그 발단이다.

'백성은 땅을 밭으로 삼는데, 아전들은 백성을 밭으로 여긴다' 고 분개했던 것이다.

민초들의 삶을 측은하게 여기는 다산에겐 배움을 청하는 18 제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극진한 공경에 힘입은 때문인지 유배의 현장에 대해서도 깊은 애착을 보인다.

10년이나 거처한 초가 주변 산 이름을 따 호 (號) 로 정하고, 약수가 흐르는 돌에 '정석 (丁石)' 이라 새긴다.

정 (丁) 은 '물이 새어 떨어지는 소리' 란 글자이니 정석은 약수가 떨어지는 돌이란 뜻이기도 하고, '물처럼 사는 삶이 꿈 (上善若水)' 인 도가의 가르침대로 물이 흐르는 그곳 샘돌 (泉石) 을 자신 정씨 (丁氏) 의 분신으로 삼겠다는 뜻도 될 터이니 글씨가 바르고 곧을 수밖에. 문화유산은 위대한 인간성취가 남긴 구체적 흔적으로만 여기기 쉬운데 꼭히 그렇지만 않을 것이다.

물질은 언젠가 세월의 마모를 입어 흩어지게 마련이나 우리 마음에 남긴 흔적은 이 민족이 살아있는 한 불멸이다.

때문에 뜻높던 선인들이 주고 받던 한 점 솔바람처럼 맑은 인정의 흔적도 빠질 수 없는 우리 유산이고 자산이다.

그러길래 차로도 얽힌 다산과 추사와 초의의 옛 인연이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차문화 중흥의 씨앗이 된 게 아닌가.

김형국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도시계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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