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마케팅 귀재’ 미국인 지갑 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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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산 뒤 1년 내 직장을 잃으면 반납 가능’ ‘실직해도 석 달까지는 할부금을 대신 내주기도 함’.

현대자동차 미국 판매법인(HMA)이 세계적 경기침체를 감안한 실직자 마케팅 전략으로 현지 시장에서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다. 반면 일본의 도요타·혼다 등 경쟁 업체들은 무이자 할부까지 내놨지만 고객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이에 따라 도요타·혼다는 지난 1월 판매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32%, 25%씩 급감했다. 미국의 GM·포드도 49%, 40%씩 추락했다.

하지만 현대차는 실직 공포를 역이용한 독특한 마케팅으로 눈길을 끌면서 판매가 오히려 14% 증가한 2만4512대를 팔았다. 이달 들어서도 호조세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인들이 실직 두려움으로 자동차 구매를 꺼린다는 점을 간파해 마케팅에 적용한 것이 성공 요인이다. 지난달 초 시작한 이런 전략은 HMA와 서울 양재동 본사 마케팅실의 교감에서 나왔다.

동시에 현대·기아차에서 ‘마케팅의 귀재’라고 불렸던 이병호(53·사진) 전무는 지난달 초 HMA 법인장으로 발령이 났다. 올해 침체된 미국 시장을 차별화한 마케팅으로 돌파하겠다는 정몽구 회장의 의지다. 정 회장은 미국에서 독특한 마케팅을 자꾸 내놔 판매를 늘려 보라는 지시를 했다. HMA 법인장은 2000년 이후 모두 경리나 해외 영업 출신이 맡아 왔다. 그러나 처음으로 마케팅 전문가를 법인장으로 발령한 것이다.

◆‘플러스 프로그램’도 내놔=이 전무는 이달 초 ‘플러스 프로그램’을 내놨다. 실직자 프로그램은 차를 산 뒤 1년 내에 직장을 잃으면 반납이 가능하다. 차량 잔존가치(중고차 값)와 할부 잔여금액의 차액 중 7500달러까지 보장해 준다. 이 금액이 넘으면 나머지는 고객이 부담해야 한다.

플러스 프로그램은 실직을 해서 할부금을 못 낼 처지가 됐을 때 최대 3개월까지 대신 내준다. 그러나 3개월간 대납 혜택을 받은 뒤 차를 반납하겠다고 하면 대납금을 뺀 나머지만 보장받는다. 예를 들어 월 할부금이 1000달러일 때 석 달간 3000달러를 대납받고 그 뒤 차를 반납하면 7500달러에서 차액을 뺀 4500달러만 보장이 가능하다. 플러스 프로그램은 이달 23일부터 4월 말까지 한시적으로 시행한다.


현대차는 이런 프로그램의 효과로 이달 들어 25일까지 판매가 전년 대비 약 10% 증가했다. 익명을 요구한 HMA 관계자는 “구입 고객이 실직을 해 차를 반납하는 경우 3개월 이내에 다시 취직을 하는 사례가 많아 징검다리식으로 이 기간 동안 할부금을 대신 내주는 것”이라며 “비용이 많이 발생해도 특수 보험에 미리 가입해 뒀기 때문에 회사로서는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스포츠 마케팅 전문가=이 전무는 월드컵부터 유로축구까지 스포츠를 이용한 마케팅 전략으로 현대차를 글로벌 회사로 도약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 회장도 그를 ‘마케팅으로 차를 파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그는 자동차와 대중이 열광하는 축구를 연결시켰다. 월드컵과 유로축구 메인 스폰서로 나섰다. 세계 주요 축구 경기가 열리는 곳마다 현대차 로고를 달아 놨다. 골프·테니스를 좋아하는 계층은 매우 보수적인 소비층이다.

하지만 축구를 좋아하는 계층은 그렇게 보수적이지 않다는 점을 간파했다고 한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는 64개 경기장 광고판을 통해 경기마다 30초 광고를 3회씩 했다. 또 현대차 이름이 새겨진 보드 광고판을 통해 경기당 평균 15분씩 브랜드를 노출시켰다. 단순 계산으로도 스폰서 비용 수천억원보다 몇 배가 많은 7조원 이상의 광고 효과를 거뒀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스폰서를 계속한다. 

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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