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유래]중구 장충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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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서울중구장충동은 망국의 풍운이 몰아치던 조선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충의와 절개를 기리기 위해 종남산 (終南山 : 남산의 동쪽봉우리) 기슭에 세워졌던 장충단 (奬忠壇)에서 유래됐다.

조선때는 한성부남부명철방 (明哲坊)에 속했던 이곳은 일제때 동서헌정 (東西軒町 : 장충동1가).서사헌정 (西四軒町 : 장충동2가) 으로 나뉘었다 광복후 일제식 동명을 우리 것으로 바꾸면서 지금의 이름을 얻게됐다.

장충단이 세워진 것은 1900년9월19일의 일로 을미사변으로 왜 (倭)에 의해 명성황후를 잃은 고종황제의 명에 의해서였다.

당시 명분은 조선개국이래의 장졸 (將卒) 을 망라한다고 했지만 실은 황후가 시해당한 것을 통탄스럽게 여긴 고종이 을미사변때 순국한 장병들을 제사지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제단설치 당시 주신 (主神) 으로 모셔진 이가 궁중에서 숙직하다 을미사변을 맞아 왜인에 항거하다 순국한 부령 (副領) 홍계훈 (洪啓薰 : 난뒤 충의공이란 시호와 함께 군부대신으로 증직) , 진남영 (鎭南營) 영관 (領官) 염도희 (廉道希) , 무남영 영관 이경호 (李暻鎬) 등이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지금은 같은 이름의 공원이 됐지만 단을 설치한 곳이 바로 경치가 좋으면서도 군영인 남소영 (南小營) 앞을 잡은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처음에는 이같이 군인들만 모시다 나중에는 역시 같은 이유로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직 (李耕稙) 과 시종 임최수 (林最洙) 등 문신들도 함께 모셔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현재 장충단공원에 있는 장충단비의 '奬忠壇' 이란 제전 (題篆) 은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이 손수 쓴 것으로 뒷면에는 충정공 민영환 (閔泳煥) 이 글을 짓고 직접 쓴 1백43자의 글이 음각돼 있으니 이 단을 모시게 된 당시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군인으로서 어려움에 당면해 죽은 사람이 많으니 슬프다.

그 서릿발, 눈보라에도 늠름하고 당당했던 뛰어난 절개는 밝기가 해.별과 같다.

' (비문중 일부) 원래 장충단은 지금의 공원안 큰 길쯤에 동향으로 앉혀졌고 비석은 그 맞은편 동쪽 (신라호텔아래쯤)에 세워졌었다.

하지만 이같은 충성심의 고취도 스러져가는 국운에는 어쩔 수 없었던듯 단이 세워진지 5년만에 을사보호조약이, 또 5년뒤에는 치욕의 합방이 이뤄지고 말았다.

합방과 함께 장충단의 운명도 다했으니 그 해 비석은 뽑혀 남산속에 버려지고 폐사 (廢祀) 됐다.

서울시 사적 1호인 장충단 비석은 해방직후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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