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증시 12년 만에 최저 … 시장은 워싱턴을 못 믿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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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3일 백악관에서 재정적자 감축 대책회의를 마치고 연설하던 중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GDP의 9.2%인 재정적자를 임기 중 3%로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워싱턴 AFP=연합 뉴스]

 미국을 비롯한 세계 증시의 출렁임이 심상찮다. 미국 주가는 12년 전 수준까지 떨어졌다. 동유럽 국가들의 ‘디폴트(채무불이행)’ 우려로 유럽 증시 역시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시장에선 “제2의 금융위기 조짐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23일 다우지수는 지난주 종가보다 250.89포인트(3.41%) 떨어진 7114.78을 기록했다. 1만4000대를 넘으며 최고치를 기록했던 2007년 10월에 비해 반토막이다. 불과 16개월 만에 미국 증시에선 시가총액 기준으로 10조 달러가 사라진 셈이다. 24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지난 10일 7870억 달러 규모의 경기부양책이 의회를 통과한 이후에도 시장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특히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이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을 은행을 솎아낼 ‘스트레스 테스트’를 시행하겠다고 발표한 뒤 은행주는 계속 곤두박질쳤다. 스트레스 테스트란 현재의 은행 재무구조와 앞으로의 경기 상황에 비춰 은행들이 향후 얼마나 제대로 영업할 수 있는지를 분석하는 일종의 시뮬레이션 테스트다. 결과가 안 좋은 은행의 경우 공적자금을 넣거나 국유화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

도움이 필요한 은행을 골라 지원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거꾸로 은행이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특히 대부분의 은행이 이 테스트를 통과하기 힘들 것이란 분석이 나오면서 시장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23일 재무부·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감독기관들이 이례적으로 공동성명을 내고 이 테스트를 곧 시행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주가 하락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떤 기준으로 테스트할 것인지 시장이 궁금해했던 내용이 빠졌기 때문이다. 필라델피아의 투자회사 하버포드 트러스트의 행크 스미스 대표는 “일련의 워싱턴의 정책에 대해 시장이 ‘노(No)’ 사인을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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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날 씨티에 이어 AIG마저 국유화의 길을 택할 것이라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시장이 술렁였다. 지난해 9월 850억 달러를 지원받으며 정부에 79.9%의 지분을 우선주 형태로 넘겨줬던 AIG가 이를 보통주로 전환하려는 물밑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보도했다.

이날 IBM·HP·애플 등 큰 덩치의 기술주들도 5% 안팎으로 떨어졌다. 경기침체로 올해와 내년 PC 수요가 큰 폭으로 줄 것이란 예측이 나왔기 때문이다.  

미국 증시가 연일 최악의 기록을 세우고 있음에도 “아직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은행들에 대한 스트레스 테스트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까지 수주일이 걸릴 예정이므로 그때까지는 금융주의 하락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또 은행의 국유화가 결정된다 해도 실제 경영이 정상화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물론 미국 정부가 대형 은행을 문 닫게 할 가능성은 작다. 지난해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이 세계 금융시장에 엄청난 충격을 준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HT)은 “재무부 관료들은 상위 20대 은행의 많은 수가 ‘대마불사(too big to fail)’에 해당한다고 본다”고 전했다.

은행 문제가 수습된다고 고비를 넘기는 것은 아니다. 이제 막 가격 조정에 들어간 은행주 이외의 주식들이 앞으로 한동안 증시 하락을 부추길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밀러 타박의 수석 애널리스트 필 로스는 “증시가 폭락했던 것만큼 강력한 상승 랠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바닥의 신호로 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

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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