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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가 있는 아침 ] - '밥이 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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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끝별(1964~ ) '밥이 쓰다' 부분

파나마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쓰다
(중략)
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며
꼭 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목메인 밥을 쓴다



동사 '쓰다'와 형용사 '쓰다'는 동음어다. 무언가를 쓰고 또 쓰는 일이란 고통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쓰다'에 깃들어 있는 무수한 몸짓, 그러나 그 소모적인 행위들이 다 부질없다고 여겨지는 저녁이 이따금 찾아온다. 몸이 더는 못 가겠다고 말한다. 그 몸을 달래어 가며 넘기는 밥이, 그 목멘 밥을 쓰는 시가 쓰다.

나희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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