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유래]서대문구 신촌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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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오늘날 대학촌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신촌 (新村) 이라 하면 대략 이대입구에서부터 신촌역을 거쳐 신촌로터리 일대를 일컫지만 정작 그 이름의 원천인 서대문구신촌동은 연세대와 신촌세브란스병원, 신촌역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리 넓지않은 지역. 조선초 태조가 개경대신 새 도읍을 이 곳에 정하려했다 하여 붙여진 '새터말' 의 한자식 표기이다.

새터말은 지금의 신촌.대현.창천동 일부지역 일대로 당시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지는 않았지만 창천 (滄川) 과 봉원천 (奉元川) 주변으로 논밭이 넓게 자리잡은 평지였다.

가장 득세하던 계룡산 대신 이곳이 새 도읍 후보지로 꼽혔던 것은 조선개국후 경기좌우도 도관찰사 (都觀察使) 로 있던 하륜 (河崙) 의 이른바 무악정도론 (毋岳定都都)에 따른 것으로 태조3년8월 태조가 몸소 이곳에 와 답사까지 했으나 결국 정도전등의 주장에 밀려 무위로 끝났다.

이후 태종 역시 1404년 재천도에 앞서 안산에 올라 이곳을 두루 살펴보기도 했다.

이같은 아쉬움때문이었을까. 태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세종은 1420년 이곳에 상왕을 위한 별궁을 지었으니 지금의 연세대구내 서북쪽에 있었던 연희궁이 그 것. 이 궁은 처음 그냥 서쪽에 있다하여 서이궁 (西離宮) 이라 하다 5년 뒤인 세종7년 정식으로 연희궁 (衍禧宮) 으로 명명됐는데 영조때 '衍' 대신 '延' 자로 고쳐 붙였다.

세종은 궁이 완성된 이듬해 뒷산에 소나무를 심도록해 경관을 좋게하는 한편 양잠을 장려키 위해 지금의 잠실동과 잠원동을 비롯해 이곳에 잠실을 설치했는데 후일 성종때는 아예 건물의 일부를 서잠실 (西蠶室) 이라 하여 양잠을 관리.감독토록 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산군11년 (1505) 이 궁은 놀이를 위한 연희장으로 바뀌었고 그때문에 여름철이면 이곳에서 버려지는 참외.수박등이 산더미를 이룬 까닭에 이를 파먹으려는 까마귀떼들이 몰려들어 이 일대는 한동안 '까마귀골' 로 불려지기도 했다.

어떤 일에 열중해 여념이 없는 모습을 두고 '연희궁 까마귀 골수박 파먹듯 한다' 는 속담이 생겨난 것도 이때문이다.

조선시대 한성부용산방에 속했던 이곳은 갑오개혁때 신촌리계신촌동으로 행정구역상 정식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1918년 신촌동134에 연세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해도 '넓은 들' 이란 뜻의 '대꿀' '대야굴 (大野洞)' 로 더 통했다.

이만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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