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진 시시각각

김구, 육영수, 성철, 그리고 김수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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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수의 옷자락을 잡았던 병든 여인처럼, 사람들은 영구차를 만지려 손을 뻗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톨릭 신자도 아닌데 사람들은 매서운 날씨에도 그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행렬에 섰다. 어떤 돈과 어떤 권력이 사람을 이렇게 움직일 수 있을까. 돈도 권력도 해내지 못한 일을 노인의 작은 시신 하나가 뚝딱 해냈다. 앞으로 누가 또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한국 현대사에서 김수환 추기경만큼 국민적 애도를 받은 이는 백범 김구 선생일 것이다. 백범은 상하이 임시정부 주석을 지냈으며 나라 잃은 백성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좌우가 싸우던 해방 공간의 혼란 속에서 1949년 6월 26일 백범은 암살됐다. 7월 5일 대한민국 최초로 국민장이 거행됐다. 7월 6일자 조선일보는 국민이 백범을 보내는 풍경을 이렇게 보도했다.

 “서울을 비롯하여 각 지역에서 모여든 군중은 거리로, 서울운동장으로 물밀 듯하여 경교장 부근은 물론 세종로, 종로를 거쳐 서울운동장에 이르기까지 장의 행렬이 지나갈 연도는 수십만의 시민으로 우리 역사상 처음 본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글자 그대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신문은 “3천만은 삼가 명복을 비나이다. 선생이여 고히 가옵소서. 산천초목도 흐느껴 우는 듯 통곡 속에 영거(靈車)는 발인(됐고), 뒤덮인 애수에 장렬(葬列)도 지연(됐다)”고 적었다.

국민장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초대 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이시영(53년)과 신익희 전 국회의장(56년) 등이 국민장으로 국민과 이별했다. 여성으로서 국민의 커다란 애도를 받은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였다. 그는 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친북 재일교포의 총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졌다. 유신독재 시절이었지만 정권의 독재성과 상관없이 육 여사의 죽음은 많은 이에게 충격과 슬픔이었다. 생의 종결이 남북 분단으로 인한 것이었고, 종결 방식이 너무 비극적이었으며, 사회의 그늘을 보살폈던 여사의 행적이 세인의 가슴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국민장 영결식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결실을 하듯이 그분이 우리 마음에 심은 평화와 사랑의 씨가 자라 그 꽃 피우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중앙일보는 여사의 마지막 길을 이렇게 보도했다. “영결식장에서 동작동 국립묘지에 이르는 연도에는 200여만 명(경찰 추산)의 시민·학생이 나와 무더위 속에서도…(중략)…가로등마다 영결식 중계 고성능 스피커 100여 개가 설치된 세종로 연도에 상오 7시부터 몰리기 시작, 식이 시작된 상오 10시엔 30여만 명에 달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독재 시절이라 동원된 슬픔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많은 이가 기억하는 걸 보면 추모엔 진실이 있었다.

93년 11월 4일 불교계의 정신적 지주였던 조계종 종정 성철스님이 입적했다. 그는 대중과 어울리기보다는 엄격하고 가혹한 수행으로 묵언의 가르침을 남겼다. 어지러운 사바(娑婆) 세계에 성철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고 말했다. 많은 지도자의 많은 말이 허공에 흩어졌지만 이 말은 사람들의 가슴 바닥에 고여 있다. 성철의 영결식은 11월 10일 해인사에서 열렸다. 차가운 가을비 속에서 3000여 승려와 10만여 시민이 참석했다.

 추기경을 보내면서 많은 이가 상실감을 느끼는 것 같다. 많은 이가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신 것 같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또 다른 어른들이 남아있다면 국민의 상실감이 이처럼 크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사회엔 전직 대통령만 5인이 있고 국회의장·대법원장·국무총리를 지낸 이가 수십 명이며 학계·문화계·종교계·언론계·재계에 수백 명의 원로가 있다. 앞으로 이들 중 어떤 이의 죽음에 사람들이 한파·무더위·가을비를 무릅쓰고 거리로 나올 것인가. 어떤 이의 죽음에 아낙과 남정네가 손을 뻗어 영구차를 만지려 하겠는가.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