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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 머무는 공간 ④대전대학교 차 없는 거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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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호 31면

①대전대학교 3개 교문 중 하나인 동문. 녹슨 철판으로 제작됐다. 철판은 건물 벽, 계단 끝, 바닥의 금 등 캠퍼스 내 건축물에 반복적으로 사용됐다. ②공학관과 학생회관 앞으로 이어지는 차 없는 거리를 학생들이 걷고 있다. 길가에는 왕벚꽃나무와 긴 의자들이 늘어서 있다. ③남문을 지나 보도를 따라 걷다 보면 차 없는 거리가 시작됨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신동연 기자 민현식 제공 

대전대학교 ‘차 없는 거리’ 공사 때 사용됐던 도면집을 건축가 민현식의 사무실에서 빌려 왔다. 옥외공간 개선 계획 시공도면이 집 한 채를 짓기 위한 도면만큼 양이 많았다. 요지는 이것이다. 현장치수를 고려할 것. 재료들-벽돌, 녹슨 철판, 쇄석, 자갈 등-의 역할에 차이를 부여할 것. 원래부터 현장에 있는 나무의 위치가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그대로 둘 것. 의자를 아주 많이 만들 것.

그러나 디테일이 완성되는 곳은 종이 위가 아니라 그 땅 위라고 하는 자명함을 현장에서 보았다. 완공되기 전까지 설계자가 얼마나 무수히 도면과 현장 속을 번갈아 드나들었을까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결국 건축에서 시공도면과 모형은, 기술과 솜씨에 근거하는 작업이라기보다 그곳을 점유할 사람에 대한 끝없는 상상력에서 출발하고 완성된다. 상상력의 기본은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다. 학교건축계획에 이십여 년간 지속적으로 헌신해온 건축가 민현식은 상상과 기억과 축적된 경험을 통하여 ‘그 거리’를 찾을 학생들의 마음과 정신에 몰입하고 관여했다.

봄엔 밝고 거대한 거실로
대전대는 1981년 개교 이래, 용운 캠퍼스의 장기적 개발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2003년 캠퍼스 종합계획을 완성했다. 당시 민현식은 마스터 아키텍트(master architect)로서 ‘차 없는 거리’ 조성을 제안했다. 캠퍼스 내 주요 시설들의 주출입구에 접속되는 순환도로의 차량을 통제하고, 우회도로를 통한 차량 이용 외에 학생·교직원·방문객들은 캠퍼스 내에서 모두 걷도록 하자는 생각에서였다. 학교의 구성원들은 즐거운 불편을 연습하는 일에 스스로 참여했다. 공사 시작 전 설계 기간에, ‘그 거리’를 몸에 미리 기억해 두기 위해 차에서 내려 다 같이 걸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나무들이 비로소 드러나 긴 숲길을 이루고 있었다. 그 거리를 쓰는 방법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차가 다녔던 길은 지난해 봄 밝고 거대한 거실(living room)이 됐다. 거실은 사람들을 강의실과 연구실에서 불러냈다. 그들에게 민현식이 가르쳐 주고자 하였던 것은, 차를 놓고 걷는 교정의 아늑함과 고요의 질서가 아니었다. 잠시만이라도 걸터앉아 보기를 권하는 긴 의자, 나무 그늘, 반짝이는 물길이 있는, 넓은 길바닥의 존재 자체에 대한 경험이다. 추상적 개념을 택하지 않고 재료와 물질의 편에 섰다. 건축 작업이 만약 아름다운 것이라면 내가 아는 이런 것 때문일 것이다라는 생각을, 그곳에 앉거나 드러누워 본 사람이면 누구든 할 수 있도록 한다.

‘차 없는 거리’의 바닥판은 건축물 사이사이를 치밀하고도 정성스럽게 파고든다. 그리고 그 속을 다시 파고드는 사람들에게, 건축행위는 작위적으로 마주하지 않는다. 디자인으로 결코 인간을 주눅 들지 않게 하고, 그저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 나긋한 모습으로 우리의 심신과 무한히 소통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건축에서의 디테일은 결국 생명과 관련이 되며 선한 것에 주력하는 증거다. ‘차 없는 거리’의 디테일은 그것을 만들어 낸 건축가의 속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계단의 끝, 바닥의 금, 풀이 돋는 자리 등의 섬세한 디테일은 새로 주입된 낯선 형식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 자리에 아주 오래전부터 박혀 있었던 광물을 찾아내 닦아 놓은 것처럼 뒤로 물러나 빛을 내고 있다.

나이가 많은 나무와 어린 나무의 옆에 의자가 설치되는 룰에도, 서로 다른 예의범절이 존재한다. 콘크리트 의자, 목제 의자, 의자는 아니면서도 앉을 만한 높이의 턱들이 주술처럼 반복된다. (의자를 벤치라고 적지 않는 이유는 용어의 상투성에 갇혀 의자 본연의 그 무엇인가를 놓칠 것 같은 언어의 한계 때문이다.) 저렇게 많은 의자를 만들어 놓기를 결정하였다면, 우리 시대의 학교는 지금껏 그만큼의 의자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 없는 거리’는 고해소처럼 학생들을 기다린다. 바라보는 방향을 정한다는 것은 등 돌리는 방향을 정하는 것과 같다. 등받이 없는 의자는 거기 앉은 사람에게 어떠한 엄숙함도 부과하지 않는다. 의자는 언제나 무명에 가깝다. 어디 무명이 의자뿐이겠는가 하다가도 도취·격정·허무주의에 놓여 있을지 모르는 연약한 학생들에게, 자신의 속을 다 꺼내놓더라도 익명이 되는 찰나를 훌륭하게 제공하는 의자들의 지극한 행렬이 고맙다.

삶의 구체성이 결합된 따뜻한 조형언어로 가득 찬 거리에서, 건축의 경이보다는 일상의 경이, 평범한 것들의 경이를 새롭게 목격한다. 학생들은 물론 동네 주민들이 거리에 낮게 앉아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지역의 문화경관이다. 삶과 관련 없는 것들의 표현이 더 우위로 소비되는 건축시장에서, 스펙터클(spectacle)을 동경하고 압도적 거대 볼륨을 탐하는 세상에서, ‘차 없는 거리’는 진정한 학교의 랜드마크(landmark)다. 드러내는 방법을 극단적으로 절제하면서 쳐다보는 사람 대신 쓰는 사람의 마음에 침투한다. 랜드마크는 본래 탐험가 등의 사람이 특정 지역을 이동하는 중에 원래의 장소로 돌아올 수 있도록 표시를 해 둔 지리학상의 상징물을 가리킨다. 만들어놓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랜드마크로 받아들일 때 진정성을 가진다.

거리를 이웃과 나누는 지혜
외연을 끊임없이 확장하고자 하는 또 다른 욕망과 싸우면서도 대전대는 지역공공의 프로젝트로서 이 좋은 거리를 이웃과 나누어 쓰는 지혜를 보여준다. 중학생 소년들이 서로 짠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리며 무리 지어 재미있게 걷고 있었다. 방학 동안 집도 학원도 아닌 다음 장소로 이 거리를 찾아와 노닌다. 우리는 청년기를 결국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다. 청년기에 읽은 책, 자주 만났던 사람, 경험한 사건들, 노상 떠나고 싶지 않았던 어떤 장소들은, 현재가 불편해 무언가를 갈급할 때, 도움을 주기 위해 속에서 예고 없이 밀려 나온다. 추억의 장소가 갖는 정확성은 누구에게나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다. 위로받았던 장소를 기억한다는 것만으로 중심을 잃지 않을 힘을 얻기도 한다. ‘차 없는 거리’가 특별한 명칭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갑자기 주변에 이름이 붙은 거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가고 싶은 거리, ○○하고 싶은 거리 등 쓸모 없는 형식주의는 거리를 사업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정작 그 거리는 늘 비어 있다. 이름을 지은 사람의 욕망만 남게 된다.

대전대 ‘차 없는 거리’ 앞에는 차를 돌려보내는 교통표지판 하나가 서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메시지를 생산하고 거리를 대상화하는 더 이상의 이름이 붙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미 명칭을 뛰어넘는 소통의 핵심도구는 ‘그 거리’ 실체라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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