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한국, 지혜·분별의 여신은 모독당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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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호 08면

오스트리아 빈 응용 미술 박물관 앞에 있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와 부엉이 분수대.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화가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의 모자이크 작품이다. 게티 이미지

미네르바는 아테나 여신의 로마 이름이다. 아테나 여신은 지혜와 기술, 분별력의 여신이다. 이 여신은 결코 서두르거나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하고 나서야 비로소 행동을 시작하는 사려 깊고 신중한 여신이다. 그러기에 이 여신이 일단 움직이면 실패가 없다. 아테나 여신, 미네르바가 전쟁의 여신이자 승리의 여신이기도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미네르바에 담긴 신화, 역사 그리고 사회

미네르바는 사려 깊은 신이기에 결코 섣부른 예단이나 예언을 하지 않는다. 미래 일을 아는 것은 제우스뿐이다. 예언의 신 아폴론도 결국은 제우스의 말을 전하는 것뿐이다. 그런 제우스도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운명은 오직 운명의 여신들만 알고 있다. 미네르바는 예측을 하기보다는 모든 정보를 총망라해서 분석하고 정확한 판단 아래 대책을 세운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사태 수습이나 조정의 명수다. 신들이나 인간사에 분쟁이 일거나 사태가 꼬였을 때, 중재하고 최종 결론을 내리는 현명한 여신이 미네르바다.

이런 미네르바가 요즘 우리나라에서 그 이름에 걸맞지 않은 망신을 당하고 있다. 미네르바란 이름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분별력이라고는 전혀 없이 경솔하게 날뛰기 때문이다. 미네르바란 가명의 한 인터넷 논객이 세계 경제 위기를 예측하고 이 위기에 서민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충고한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남자’가 미네르바 ‘여신’의 이름으로 예측을 하고 남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신탁을 내렸으니 이는 아폴론의 영역을 침범한 심각한 ‘위반’이다. 올림포스 세계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범죄’다. 자신이 선택한 가명처럼 진정으로 미네르바가 되려 했었다면 정확한 분석을 통해 명성을 얻고 ‘예언’이나 ‘신탁’은 참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정말 사태가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위기 극복의 구원투수’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대책을 세우고 이에 따라 수습하는 것은 미네르바의 주특기다. 미네르바님은 너무 경솔하게 나서서 일생일대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또 ‘신동아’는 검찰에 검거된 미네르바는 가짜고 ‘7인조 미네르바 떼’가 따로 있다고 주장하다가 뒤늦게 오보였다고 사과 보도를 냈다. 보도에 앞서 사건의 진실을 세세한 데까지 먼저 조사해야 하는 언론의 기본기마저 지키지 않았다. 미네르바였다면 결코 하지 않을 실수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전체적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는 꿈쩍도 않는 미네르바의 신중함과 현명함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런 실수와 망신은 당하지 않았으리라. 미네르바는 신중함과 현명함 때문에 백전백승한다. 그게 없다면 백전백패다.

그리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앞 미네르바 조각상 앞에서 포즈를 취한 유재원 교수.

‘법(法)’도 너무 빨리 반응을 보였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녘에 날개를 편다.” 이는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법철학』의 서문에 쓴 말이다. 법은 너무 빨리 나서지 말라는 헤겔다운 점잖은 충고다. 부엉이는 ‘미네르바의 새’다. 무시무시한 괴물 ‘티폰(Typhon)’이 올림포스를 공격해 왔을 때, 공포에 질린 신들은 각기 동물로 변신해 몸을 숨겼다. 이때 미네르바가 선택한 모습이 밤이 돼야 날개를 펴는 부엉이였다. 남들이 쉬는 밤 동안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모든 사태가 파악되면 그제야 쥐도 새도 모르게 상대방을 기습하여 꼼짝 못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부엉이야말로 미네르바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동물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눈만 껌벅거리면서 시침을 떼는 고수가 미네르바다. 그런데 검찰의 날갯짓은 시기가 빨랐다. 법은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하지만 가혹한 데가 있고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보다는 당사자들에게 상처만 남기는 부정적인 면이 있어 가장 마지막에 나서야 한다. 더구나 일개 청년이 몇 마디 주제넘은 예측과 신탁을 했다고 발끈하여 나서는 것은 미네르바답지 않다.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어두운 곳에서 은밀히 조사하여 모든 것을 파악한 뒤에 세상 민심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고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설 때 비로소 날개를 펴고 행동에 나서는 것이 미네르바다운 행동이다. 그래야만 민중이 법을 존중하고 심지어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미네르바 여신의 신중함과 과묵함을 존경한다.

이렇게 된 데는 낮 새인 까치의 침묵도 한몫했다. 우리나라 민화를 보면 호랑이 옆에 까치가 한 마리 그려져 있다.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까치는 부리를 놀리고 있다. 계속 시끄럽게 무언가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호랑이는 귀찮고 짜증 나는 표정으로 까치를 험상궂게 쳐다본다. 그러나 까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호랑이는 권력자다. 까치는 권력자가 하는 일에 일일이 토를 달고 비판한다.

그래도 호랑이는 까치를 어쩌지 못한다. 나뭇가지 위라는 ‘철밥통’ 위에 앉아 있는 데다가 날개까지 있어 훌쩍 도망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호랑이가 임금이라면 까치는 지식인이고 언론이다. 요즘 권력자에게 바른 소리 하는 까치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대학의 그 수많은 경제학과 교수님들 가운데 세계 금융 위기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대책을 이야기한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의 신자유주의식 경영과 세계화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며 입에 거품을 물던 경제 전문가들은 정작 경제 위기가 오자 갑자기 입을 다물고 꼬리를 감췄다. 까치가 아침에 울어야 반가운 손님이 올 텐데 울지를 않는다. 그 많던 까치는 다 어디로 갔는가. 그 해박한 지식과 소신을 자랑하던 경제학 ‘박사님’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래서 공고 출신 전문대학 졸업생이 떠들고 나섰다. 그리고 그런 그의 행동에 대한 사회적 반응은 ‘미네르바’ 본인이 밝힌 대로 의외로 뜨거웠다. 세상은 시끄럽고 호랑이 귀에 거슬리는 까치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까치가 울지 않아 모처럼 조용하고 흐뭇한 시간을 보내던 호랑이는 그 소리가 거슬린다고 부엉이를 잡아 혼내 주고 있다. 그런데 다른 까치 한 마리가 “그 부엉이가 아닌데, 부엉이는 한 마리가 아니라 일곱 마린데” 하고 흰소리 하다가 잘못 알고 실수한 것이라고 꼬리를 내렸다. 이것이 때 아닌 부엉이 ‘미네르바’ 사건의 전모다. 지혜와 기술, 분별력의 여신으로 모든 것을 파악한 뒤 행동을 시작하는 미네르바의 이미지는 이런 소란 속에 거짓말과 경거망동의 대명사처럼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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