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3>이문구와 청진동 시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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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호 13면

이문구 작가가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다

문인협회 사무실이 지금 세종문화회관 뒤 예총회관에 있을 무렵, 문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지방에서 상경한 문인들이 인사차 들르거나, 기관지 ‘월간문학’에 작품을 발표하고자 원고 뭉치를 싸 들고 기웃거리는 정도였다.

김동리가 조연현에게 이사장 자리를 내주고 이문구와 함께 월간문학지 ‘한국문학’의 창간을 준비하던 1973년 봄부터 청진동 뒷골목은 드나드는 문인들로 은연중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일찍부터 문학 출판에 공을 들이던 민음사와 신구문화사, 그리고 이광훈·권영빈이 만들던 종합월간지 ‘세대’의 사무실이 자리를 잡고 있어 청진동은 문인들의 발걸음이 비교적 잦은 편이었다.

한때 문학을 꿈꿨던 박맹호 사장의 민음사에는 ‘문학과 지성’ 동인인 이른바 ‘4K(김병익·김현·김주연·김치수)’와 황동규·이청준·홍성원·김원일 등이 자주 드나들었다. 신동문이 주간이었던 신구문화사에는 그가 계간 ‘창작과 비평’의 주간까지 겸하고 있었으므로 염무웅·고은·박태순·황석영·이호철·천승세 등 ‘창비’와 가까운 문인들이 항상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양쪽은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 인연으로 얽혀 있었음에도 문학적으로는 색깔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이 이곳을 ‘문인의 거리’로 진일보시키는 데 얼마간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한국문학’ 편집실이 청진동 한복판에 자리 잡으면서 다소 쌀쌀했던 청진동의 문단 온도가 상승 기류를 탈 수 있었던 것은 양쪽을 아우르는 이문구 특유의 포용력과 친화력 때문이었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문구’라는 이름은 청진동의 대명사처럼 돼 가고 있었다. 이문구는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가 남로당 보령군 위원장을 지냈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두 형이 학살당한 비극적인 가족사를 지닌 소설가였다. 하지만 그는 비슷한 배경을 가진 다른 몇몇 문인과 달리 문학적으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같은 스승이었던 김동리의 영향 때문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역사와 사회를 보는 냉철한 시각, 그리고 문학과 문인에 대한 극진한 애정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문단 전체를 꿰뚫고 있었다. ‘문단통’이니 ‘마당발’이니 하는 표현으론 부족할 정도였다. 그 무렵 이문구는 이렇게 술회한 적이 있다. 1300여 문인 가운데 안면을 트고 지내는 문인이 1000명은 넘는다는 것, 그들의 주소·직장·교우관계·파벌관계를 자신의 손금 들여다보듯 꿰고 있다는 것, 그중에서 한 번 이상 차를 마셔 본 사람이 700여 명이고 술을 마신 사람이 500여 명이며 식사를 한 사람이 300여 명에 달한다는 것, 결혼식 돌잔치에 참석하거나 상 당했을 때 밤샘을 해 준 사람만도 200명이 훨씬 넘는다는 것이다. 데뷔한 지 10년이 채 안 됐을 때였음을 감안하면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시느냐’고 물으면 ‘1년에 366일을 마신다’고 대답할 정도의 대단한 술꾼이었으니 이문구를 찾는 문단 술꾼들이 줄을 이으면서 청진동 거리가 낮이고 밤이고 들썩거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하루 저녁에 서너 개의 술자리를 옮겨 다녀야 할 정도의 바쁜 몸이 돼 가고 있었다. 대작(對酌) 파트너로 그가 가장 인기 있었던 까닭은 물론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그의 사람됨이 큰 몫을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아무리 마셔도 좀처럼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이문구만의 특별한 술자리 매너 때문이었다.

30대 중반을 훌쩍 넘어서도록 결혼해 가정을 꾸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무렵 이문구의 일상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가 갈 만한 일이었다. 그때 이문구는 결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싸가지 없는 내 자신과 다 된 사회에 무엇 한 가지 기대할 것이 없다고 믿는 판에, 하물며 남의 딸자식 데려다 가꿀 근심, 늦자식 기를 걱정에 곁들여 손자 늦는 시름까지 겸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그와 가까이 지내던 문인들은 이문구에게 결혼해 안정을 찾도록 끈질기게 권유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동년배의 한 문인이 농반진반으로 이렇게 말했다.
“자네, 사무실에서 서영은씨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던 걸. 처녀·총각인데 뜸 들일 것 없이 합치는 게 어때?”
이문구는 잠깐 뭔가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혼자 씩 웃고 말았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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