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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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제가 바로 이예린이예요. 놀라셨죠?" "…" 하영을 찾으러 나왔다가 엉뚱하게도 이예린을 만나게 되는 상황, 그게 너무 황당하게 여겨져서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이렇게 불쑥, 그것도 밤늦게 나타나서 정말 미안해요. 근데, 누굴 찾으러 나오신 모양이죠?" 당돌하게 느껴질 정도의 눈빛으로 그녀는 내 얼굴을 주시했다.

"찾으러 나온 건지 따라나온 건지, 나도 잘 모르겠소. " "어떤 여자분이 내가 타고온 택시를 타고 내려갔는데…그분인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그녀는 중얼거렸다.

"근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죠?

만약 이 오피스텔에 다른 볼일을 보러 왔다가 우연히 나를 발견했다고 말할 작정이라면 들은 걸로 하고 그냥 들어가겠소. " "아니 그럴 생각은 없어요. 다른 볼일을 보러 온 것도 아니고 우연히 선생님을 발견한 것도 아녜요. 좀 늦긴 했지만, 전 분명히 이본오 선생님을 만나러 여기에 온 거라구요. " 적당히 둘러칠 생각은 주호도 없다, 하는 걸 그녀는 분명하게 강조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럼 보나마나 다큐멘터리 건으로 왔을 텐데…아무래도 이예린씨가 기습시기를 잘못 잡은 것같소. " "지금은 그런 걸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그런 뜻인가요?" "그런 뜻이요. " 그녀의 또랑또랑한 눈빛에서 여전히 미묘한 이끌림 같은 것 느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괜찮아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그 문제를 논하자는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저에게도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결정은 내려야 해요. 그러니까 괜찮으시다면 한두시간 정도만 시간을 내 주세요. " "지금 당장 말이요?" "아뇨, 오늘 말구…선생님 편하실 때요. 그러니까 오늘 제가 여기까지 찾아온 건 출연 여부 때문이 아니라 한번만 절 만나 달라는 말을 하러 온 거예요. 무작정 싫다고만 하시니까 저로서도 달리 방도가 없었거든요. 이렇게 쳐들어 오는 수밖에…" 왜일까,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다소 서글픈 표정으로 꽃나무들이 심어진 화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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