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 시시각각

서울시의 ‘전화 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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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어제 본의 아니게 공무집행을 방해했다. 좋게 보면 미스터리 쇼퍼(mystery shopper·손님을 가장해 서비스 상태를 점검하는 사람) 역할을 했다고나 할까. 서울 전화(02)로 120번을 눌렀다. 서울시의 전화민원종합센터, 이른바 ‘다산콜’ 번호다.

첫 번째 전화에서는 “왜 명칭을 다산콜이라고 지었나”라고 물었다. “잠시 기다리시라”는 말 뒤 1분10초 만에 “다산(茶山)은 정약용 선생의 호이며, 나라의 근본인 민(民)을 위해 지방행정을 지속적으로 혁신해야 한다고 강조한 선생의 철학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호를 빌려왔다”는 상담원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전화에선 약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창경원에 있던 동물원이 언제 없어졌느냐”고 물었다. 1분30초가량 지난 뒤 상담원이 나와서 “자세히 알아보고 전화 드리겠다”며 연락처를 물었다.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자 4분이 채 안 돼 전화가 왔다. “창경궁 측에 알아보니 1984~86년 창경궁 복원 공사가 진행됐고, 동물들은 83년에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므로 동물원은 83년에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두 여성 상담원에게 조금 미안하면서도 솔직히 말해 세금 내는 보람을 느꼈다. 지난해 동네 보건소를 다니며 패치·금연침 등 무료 금연클리닉 서비스를 받을 때도 이런 느낌을 받았었다(비록 금연은 석 달 만에 도로아미타불이 됐지만). 관공서나 큰 기업에 전화했다가 ‘뺑뺑이 돌리기’를 당해본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휴대전화 서비스 하나 해지하려면 얼마나 힘든가. ARS의 건조한 기계음에 한참이나 농락(!)당하다 상담원의 살아있는 목소리와 겨우 연결될 즘엔 불만을 터뜨릴 기력조차 소진된다. 게다가 상담원은 보나마나 아무 죄도 권한도 없는 어린 비정규직 여성일 터. 불평해봤자 애꿎을 뿐이다.

하루 24시간, 1년 내내 쉬지 않는 다산콜 서비스는 재작년 9월 문을 열었다. 1년5개월 만에 440만 통화를 넘어섰다. 요즘은 하루 평균 1만3200건을 처리한다고 한다. 2006년 조사에 따르면 서울시민이 전화번호를 찾아 시청에 전화해서 궁금한 점을 묻고 답변을 듣기까지 평균 67분이 걸렸다. 지금은 평균 3분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전화 혁명’이다. 서울시에 관한 모든 정보를 2만9000건의 데이터베이스로 정리·구축해 놓은 덕분이다. 엉뚱하거나 매우 전문적인 질문도 상담원이 관련기관에 문의하거나 인터넷을 검색해 답변한다. 영어·일어·중국어 문의도 가능하고, 청각장애인과는 화상전화로 수화를 주고받는다. 전화가 뜸한 시간에 홀몸(독거)노인들과 통화하며 말벗이 돼주는 서비스도 하고 있다.

 나는 서울시의 전화 혁명이 사상 초유의 경제위기를 맞이한 지금 절박한 이들을 어루만지는 ‘소통 혁명’으로 진화하는 모습에 더 점수를 주고 싶다. 다산콜에 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한 전화는 지난해 9월 949건, 11월 1468건, 12월엔 1644건이었다.

올해 1월에는 폭발적으로 늘어 3301건. 지난해 1월(948건)의 3배를 훌쩍 넘었다. 2월 1일부터 18일까지는 3858건으로 이미 1월 기록을 깼다. 주로 실직·부도·폐업에 따른 고통이나 일자리·병원비·기초생활보호 문제라고 한다. 인구 1045만의 대도시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에는 화곡동의 주부가 “허리디스크에 난청이라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 무직자 남편은 집에도 잘 안 들어온다. 월세 30만원이 몇 달째 밀려 집주인이 전기를 끊었다”고 하소연했다. 상담원이 화곡동 주민센터에 도움을 청한 덕분에 쌀·라면을 지원받고 청소보조원 일감도 생기자 끊겼던 전기가 들어왔다.

세금 내는 보람은 그 돈이 꼭 자기에게 돌아와야만 느끼는 게 아니다. 자기보다 어려운 이를 위해 제대로 쓰이는 세금은 보람이 몇 배나 더 크다. 다산콜, 참 잘 만든 제도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